남아메리카의 역사

황금법(레이 아우레아): 1888년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역사

황금법(Lei Áurea, 법률 제3.353호)은 1888년 5월 13일,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황제의 딸인 이자벨 공주에 의해 재가되었습니다.

이 법은 당시 브라질에 남아 있던 약 70만 명의 노예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며, 브라질에서의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이 법의 재가는 농장주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지급하지 않고 노예제를 폐지한 보수파들의 승리로 기록됩니다.

제국 황실에게는 정치적 지지 기반의 상실을 의미했고, 노예들에게는 사회 통합 없는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황금법(레이 아우레아): 1888년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역사

핵심 요약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이 시작된 이래 약 30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인간을 노예로 삼는 행위는 포르투갈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활동이었습니다.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에 설립된 무역 거점들은 사실상 이 노예 무역으로만 존속했습니다.

노예제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의 강제 무보수 노동에 기반했기 때문에, 당시 지배층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노예들은 처음에는 파우브라질(브라질목) 채취에 동원되었고, 이후 설탕 공장, 금광, 커피 농장 등에서 일했습니다. 또한 가사 노동을 수행하고 집·다리·교회를 건축했으며, 예술 작품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식민지 시기 동안 모든 육체노동은 노예 노동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토지 소유주들은 노예를 구입하면서 본국인 포르투갈에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세계는 산업 생산 방식을 확립해 가고 있었고, 순수한 인력은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여러 유럽 국가들이 자국 내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으며, 이후 식민지에서도 이를 폐지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폐지론자들, 해방된 흑인들, 영국, 제국 황실이 브라질 정부에 노예제 폐지를 압박했습니다.

1888년 5월 13일, 상원은 폐지 법안을 논의한 끝에 통과시켰습니다. 문서는 즉시 리우데자네이루의 궁전으로 옮겨졌고, 제국 섭정인 이자벨 공주가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금법(레이 아우레아): 1888년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역사

단타스 상원의원(Manuel Pinto de Sousa Dantas, 1831~1894)을 비롯한 제국의 권력자들과 함께 섭정은 브라질의 노예제 종식을 선언하는 황금법(법률 제3.353호)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단 두 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코테지피 남작은 서명된 법률을 받으며 이자벨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전하, 내기에서 이기셨고 한 민족을 해방시켰지만, 왕좌를 잃으셨습니다."

노예제 폐지로 이어진 법률들

황금법 이전에도 브라질에서 노예 노동의 소멸을 목표로 한 세 가지 법률이 있었습니다.

  • 에우제비우 데 케이로스 법: 1850년 9월 4일 에우제비우 데 케이로스(Eusébio de Queirós, 1812~1868) 장관에 의해 제정된 법률 제581호.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통해 운송되던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 자궁 자유법: 법률 제2.040호로, 최초의 폐지론 법으로 간주됩니다. 1871년 9월 28일 리우브랑쿠 자작(1819~1880)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그날 이후 노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 60세 노예법: 법률 제3.270호로, 사라이바-코테지피 법이라고도 불립니다. 1885년 9월 28일 코테지피 남작(1815~1889)의 보수 정부 하에서 제정되었으며, 60세 이상 노예에게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브라질이 노예제를 폐지한 마지막 서구 국가였다는 점도 기억할 만합니다.

결과와 영향

황금법 서명과 함께 지주들은 황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노예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주로 군부 내에서 성장하던 공화파를 지지하게 되었고, 불과 1년 7개월 후 군주제는 전복되고 제국 황실은 브라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자벨 공주의 경우, 그녀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교황 레오 13세(1810~1878)로부터 노예제 폐지라는 공로를 인정받아 '황금 장미' 훈장을 받았으며, 그녀의 결단은 해방된 흑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1970년대까지 그녀는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진정한 주역으로 기려졌지만, 이후 그녀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흑인 운동 일각에서는 반성의 날로서 11월 20일, 흑인 지도자 줌비(Zumbi)의 기일을 기념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수천 명의 전 노예들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농장에 남아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거나, 도시로 떠나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유럽 이민

노예제 폐지는 자유를 의미하는 행위였지만, 국가는 해방된 노예들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국 정부는 이들을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흑인을 위한 공공 정책을 시행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1889년 공화정 쿠데타 이후 새 정권 역시 흑인 인구에게 시민권을 확산시키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유로센트리즘', 즉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시각에서 지주들은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민 노동력을 선호했습니다. 그들은 흑인이 임금 노동 체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소위 '유럽 중심주의'는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역사적 편견이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많은 흑인과 그 후손들이 인종차별과 기회 박탈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내 최대 재소자 인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 구매력 역시 가장 낮은 수준인데, 이는 백인 또는 유럽계 후손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 브라질의 노예제를 종식시킨 법에 붙은 '황금(golden)'이라는 이름은 '금'을 의미하며, 국가에 새롭게 열린 '계몽된' 시대를 상징합니다.
  • 5월 17일, 리우데자네이루의 상크리스토바웅 궁전(현재 킨타 다 보아비스타 박물관) 앞에서 야외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작가 마샤두 드 아시스(Machado de Assis)도 참석했습니다.
  • 우연히도 의회 논의는 5월 13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날은 이자벨 공주의 증조부인 포르투갈 주앙 6세(1767~1826)의 생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5월 13일은 '노예제 폐지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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