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학살: 평화 시위가 유혈 탄압으로 변한 날, 프랑스가 인정한 국가 책임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학살: 평화 시위가 유혈 탄압으로 변한 날, 프랑스가 인정한 국가 책임1961년 10월 17일, 알제리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FLN(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호소에 응답한 수많은 시위대가 긴장감이 감돌던 파리 거리를 무기를 들지 않고 행진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이 이끄는 경찰의 대응은 극도로 폭력적이었습니다. 시위대는 추격을 받아 구타당했고, 센 강에 던져지거나 대거 체포되었습니다. 이날의 피해 규모는 오늘날까지도 무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으며, 세티프 학살(1945년 5월 8일)처럼 그 규모와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12년에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이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1961년 10월, 어떤 상황이었나

1961년은 알제리 역사에서 격동의 해였습니다. 2월에는 OAS(비밀군사조직)가 창설되었고, 4월에는 알제리 장군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8월에는 페르하트 압바스(Ferhat Abbas)가 이탈하는 등 알제리 민족주의 진영에 큰 변동이 이어졌습니다.

드골 정부와 GPRA(알제리 공화국 잠정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OAS는 프랑스 본토에서도 공격을 감행했고, FLN은 프랑스 경찰을 표적으로 삼아 1961년 초 이후 약 30명의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모리스 파퐁이 이끄는 파리 당국이 '알제리 출신 프랑스 무슬림'(더 넓게는 이민자들)에게 통금령을 부과할 명분이 되었습니다. 이에 FLN은 1961년 10월 17일, 통금령에 대한 비폭력 시위를 통해 항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평화 시위가 학살로 변하다

시위 참가자는 최소 2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FLN의 영향력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때로는 위협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시위대의 대다수는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파리 교외의 빈민가에 거주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간접 피해와 맹목적인 단속으로 변질된 FLN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시위대들은 더 먼 곳에서부터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학살: 평화 시위가 유혈 탄압으로 변한 날, 프랑스가 인정한 국가 책임10월 17일 오후, 경찰은 이미 파리의 기차역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도착하는 시위대의 움직임은 예상된 것이었고, 많은 이들은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거나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약 2만~3만 명의 시위대가 그랑 불바르(Grands Boulevards), 에투알(Étoile), 생미셸(Saint-Michel), 생제르맹(Saint-Germain) 등 파리 곳곳의 집결지에 도달했습니다.

행진은 통금령이 시작되는 오후 8시경 본격화되었습니다. 행렬에는 젊은 남성과 노인, 여성과 아이들까지 함께했습니다. 첫 번째 체포가 시작되었지만 행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는 "알제리인에게 알제리를", "FLN 집권", "경찰 내 인종차별 척결"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상황은 오후 9시 30분경 급격히 험악해졌습니다. 총성이 울리자 경찰은 오페라 극장과 렉스(Rex) 영화관 인근에서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습니다. 체포된 시위대들이 신원 확인 센터로 이송되면서 체포 건수는 계속 불어났고, 그곳에서도 폭력은 이어졌습니다. 밤 10시를 앞두고 모든 것이 가속화되었고, 낭테르(Nanterre) 인근을 포함한 모든 시위 장소에서 폭력 사태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밤중의 혼란 속에서, 텅 빈 거리는 경찰과 시위대 간 추격전의 현장이 되었고, 일부 시위대는 체포를 피해 센 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퐁 드 뇌이(Pont de Neuilly), 에투알, 오페라, 대로변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자정 무렵 모든 것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 1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체포된 상태였습니다. 이후 며칠간 새로운 시위가 계획되었지만, 당국은 어떤 시도든 통제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다음 날 특히 낭테르를 중심으로 대규모 급습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추방되기까지 했습니다.

1961년 10월 17일의 결과: 사망자 수를 둘러싼 논란

체포 건수 자체는 큰 이견이 없지만,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논쟁거리입니다. 베냐민 스토라(Benjamin Stora) 등이 제시한 가장 신뢰할 만한 추정치에 따르면 최소 2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봅니다.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조차 수십 명의 사망자를 전제하는데, 이만큼만 해도 극도로 긴장된 상황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학살: 평화 시위가 유혈 탄압으로 변한 날, 프랑스가 인정한 국가 책임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사건의 다음 날부터 준오메르타(quasi omerta, 침묵의 공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검열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매우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은 물론, 밤의 폭력을 보도하려 했던 '공화국의 경찰' 내부에서조차 이 10월 17일을 지워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최전선에는 모리스 파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망 사실 자체를 부인한 뒤에는 FLN 특공대가 사망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조사위원회는 연말이 되자 조용히 묻혔습니다. 1962년 2월 샤론(Charonne) 지하철역 참사가 터지면서 좌파의 관심은 OAS와의 투쟁으로 더 깊이 쏠렸고, FLN 진영을 포함해 남은 것은 정치적 실용주의—냉소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는—였습니다. 협상 테이블로 돌아가기 위해선 나쁜 기억을 외면하는 법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1961년 10월 17일은 오늘날까지도 '국가 학살'이라는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날입니다.

참고문헌

- B. Stora, 알제리 전쟁의 역사(1954–1962), 라 데쿠베르트(La Découverte), 2004.

- M. Lévine, 10월의 라토나드: 1961년 파리에서 벌어진 집단 살인, 램지(Ramsay), 1985.

- J-P. Brunet, 경찰 대 FLN: 1961년 10월의 드라마, 플라마리옹(Flammarion), 1999.

- J-L. Einaudi, 파리 전투: 1961년 10월 17일, 쇠유(Seuil), 1991.

- J-L. Einaudi, 1961년 10월: 파리 학살, 페이야드(Fayard),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