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점령지에서의 정치적 숙청, '볼프스엔겔' 누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점령지(SBZ)에서 수천 명의 아동과 청소년이 나치 조직 '볼프스엔겔(Werewolf)'에 가담했다는 허위 혐의로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사실은 동독(GDR) 시절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러시아 군인에게 '볼프스엔겔' 혐의로 체포된 카를하인츠 바우
1945년 12월, 16세 소년 카를하인츠 바우(Karl-Heinz Vau)는 펜츨린의 무도회장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지하에서 소련군에 맞서 나치 '볼프스엔겔' 조직을 위해 싸웠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동생 호르스트 바우(Horst Vau)는 75년 전 형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을 떠올리며, 전쟁이 끝난 지 반 년이 지난 시점에 13명의 펜츨린 청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그중에는 형 카를하인츠와 친구 에르빈 벤트(Erwin Wendt)가 있었다.
평생의 상처가 된 실종
호르스트 바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야 형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들과 에르빈의 어머니가 커튼 뒤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 그는 "그 모습이 형의 운명을 조사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당시 가족들은 공포 속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내에서도 금기시된 진실
1965년생 비르거 비르크홀츠(Birger Birkholz)도 삼촌 하인츠(Heinz)와 호르스트(Horst)의 운명을 오랫동안 몰랐다. 조부모 집 거실에는 삼촌 하인츠의 사진만 걸려 있었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비르크홀츠는 성인이 되어 말코(Malchow)에서 벌어진 가족사의 비극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말코에서 체포된 33명의 소년소녀
종전 직전 붉은 군대가 말코를 점령한 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소련 비밀경찰(GPU)은 33명의 소년소녀를 체포했다. 이들은 종전 직전 나치에 의해 소위 '볼프스엔겔'로 모집되어 이미 점령된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라는 임무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비르크홀츠의 삼촌 하인츠는 동생 호르스트가 인질로 잡히자 자수했지만,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자수를 권유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수천 명의 청소년이 정치적 숙청의 희생양이 되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州) 제독재청산 담당 국장 안네 드레셔(Anne Drescher)에 따르면, 소련 점령지 전체에서 수천 명의 미성년자가 정치적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당시 실종된 청년들의 친척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찾고 있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 수 없으나, 1945~1950년 사이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2만 명으로 추산된다. 1946년 한 해에만 SBZ에서 3,000명 이상의 청소년이 '볼프스엔겔'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파르티잔이 아니었다. 드레셔에 따르면 서방 연합국은 전쟁에 지친 독일 민간인 사이에서 1945년 4월 하인리히 힘러가 창설한 '볼프스엔겔' 조직에 동원될 청년이 거의 없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러나 소련은 달랐다.
독일의 '절멸 전쟁'이 소련의 경계를 낮췄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와 붉은 군대는 독일이 자국에서 벌인 '절멸 전쟁'과 수백만 명의 사망자, 파괴된 도시들을 목격했다. 전쟁 말기에는 광신적인 저항까지 경험했기에, 소련 측의 억제 임계점은 크게 낮아져 있었다. 소문만으로도 청년들이 매도되고 연행되었으며, 가족들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빌라 블란크 지하실에서 사망한 13명의 청년
SBZ 전역에 NKVD의 취조실과 지하 감옥이 있었다. 말코에서는 과거 '빌라 블란크(Villa Blanck)'가 사용되었다. 비르크홀츠의 두 삼촌도 1946년 1월 이곳에서 심문을 받았다. 말코에서 체포된 33명 중 13명이 이 빌라 지하실에서 사망했다. 현재 이 건물은 별장으로 쓰이고 있다. 생존자들 중 일부는 동독 붕괴 후 이곳을 찾아 과거를 마주했다. 16세에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운터마스펠트(Untermassfeld) 교도소에 1951년까지 수감되었던 데틀레프 푸차어(Detlef Putzar)나, 바렌(Waren) 및 뢰벨(Röbel) 비밀경찰 지하실에 갇혔다가 1946년 슈베린(Schwerin) 소련 군법회의에서 장기형을 선고받은 화가 빌헬름 슈프릭(Wilhelm Sprick)의 그림만이 그곳의 참상을 증언한다.
강제 자백에 근거한 군법회의와 사형 선고
당시 청소년들은 성인 범죄자처럼 재판받았다. 러시아 형법에 따르면 12세 이상은 완전한 형사책임능력이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심문은 밤에 러시아어로 진행되었으며,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했다. 변호인도, 증거도 없었다. 심문 조서와 강요된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자백이 나올 때까지 구금과 '자백 생산'이 계속되었다"는 것이 드레셔의 설명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하인츠 비르크홀츠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46년 8월 퀴스트로우(Güstrow)에서 처형되었다. 동생 호르스트 비르크홀츠는 바우첸(Bautzen) 교도소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카를하인츠 바우는 12년 수용소형을 선고받고 1948년 3월 소련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특별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생을 마감했다.
침묵 강요와 슈타지의 감시
SBZ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약 8,000명의 청소년이 교도소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석방되었으나, 동독에서 '침묵 선언서'에 서명해야 했고 슈타시(Stasi)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생존자가 서독으로 이주했다. 호르스트 비르크홀츠도 바우첸에서 97개월을 복역한 후 크레펠트(Krefeld) 인근에 정착했다. 동독 시절 조카 비르크홀츠는 삼촌의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전화 연락도 어려웠고, 불확실성과 어쩌면 약간의 죄책감도 작용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장벽 붕괴 뒤에야 이루어진 늦은 명예 회복
말코에는 이미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러시아 문서고와 슈타시 문서가 개방된 장벽 붕괴 이후에야 가족들은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 국가에 의해 수천 명의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드레셔는 "그들은 무죄였으며, 전혀 관계없는 일로 수용소에서 고통받았다. 나치 가해자나 범죄자로 역사에 남지 않기 위해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전쟁 종전 75주기, 침묵 속의 추모
오늘날 과거 빌라 블란크 앞에는 말코의 '볼프스엔겔' 비극을 기리는 추모비와 명판이 세워져 있다. 82세의 호르스트 바우는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 자들에게 다시 목소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코에서 체포된 하인츠와 호르스트 비르크홀츠를 포함한 33명의 소녀와 소년 이름을 명판에 새기도록 했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 뒤에 체포된 이 청년들 중 누구도 진짜 나치 '볼프스엔겔'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