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법정에 선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 가해자들: 회개하지 않은 SS 간부들을 심판한 큐리오하우스 재판

1946년 3월 18일, 독일 함부르크의 큐리오하우스(Curiohaus)에서 노이엔가메(Neuengamme) 강제수용소 책임자들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이 영국 군사법정 주재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피고석에 앉은 가해자들에게서 반성의 모습은 끝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글: 이레네 알텐뮐러(Irene Altenmüller)

소위 '큐리오하우스 재판'에서는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의 마지막 소장 막스 파울리(Max Pauly)를 포함한 SS 고위 간부 14명이 기소되었습니다. 이들은 수감자 살해와 학대, 소련 전쟁포로에 대한 가스 살해, 그리고 '노동을 통한 몰살(Vernichtung durch Arbeit)' 혐의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피고인 중에는 함부르크 로텐부르크소르트(Rothenburgsort) 지역 불렌후저담(Bullenhuser Damm) 학교에서 어린이 20명을 학살한 사건에 연루된 SS 요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은 나치 범죄를 기소할 때 연합국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로 그 범위를 한정했습니다. 1945년 12월 말부터는 독일인이 독일인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소 권한을 독일 법원으로 이관했습니다.

마루 밑에 숨겨진 사망 기록부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해방했을 때 마주한 시체의 산더미와 앙상한 수감자들과 달리,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는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발견되었습니다. SS는 1945년 4월 수용소를 떠나기 전 범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거의 모든 서류를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수감자 신분의 서기가 마지막 분기 보고서와 사망 기록부를 간신히 확보해 의무실 마루 밑에 숨겨둔 덕분에, 이 문서들이 재판에서 영국 수사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서면 증거가 되었습니다.

수사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원은 전직 수감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노이엔가메에서 자행된 범죄를 폭로하고 가해자를 지목하며 증인으로서 증언대에 섰습니다.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

함부르크 로텐바움샤우세(Rothenbaumchaussee)에 위치한 큐리오하우스는 영국군의 법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직 수감자 18명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이들은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환경과, 팔을 등 뒤로 묶은 채 매달거나 채찍질하는 등의 잔혹한 처벌 실태를 고발했습니다. 1940년 6월부터 공산주의자 혐의로 노이엔가메에 수감되었던 목격자 알빈 뤼트케(Albin Lüdke)는 "수감자가 식사 시간에 손수건을 빨았다가 오후에 작업장으로 걸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이 가해졌다고 증언했습니다.

"수감자들이 천천히 죽도록 내버려 두라"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 강제 노동에 동원된 이들일수록 생존 가능성은 가장 낮았습니다.

심리의 핵심 쟁점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전략인 '노동을 통한 몰살'이었습니다. 1944년 6월 노이엔가메에 수감되었던 프랑스의 해부학 교수 마르셀 프르낭(Marcel Prenant)은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영국인 교사이자 전 수감자였던 해럴드 르 드루예넥(Harold Le Druillenec) 역시 비슷한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수감자들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최대한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 요컨대 노동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반성 없는 피고인들

증인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피고인들에게는 번호표가 부착되었고, 변호인들은 그들 앞줄에 착석했습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고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판 시작 당시 전원이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해당 법률의 틀 안에서 행동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범죄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상황을 축소하고, 심지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수감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해자들의 뻔뻔함

SS 요원 발터 퀴멜(Walter Kümmel)은 법정에서 자신이 배려심 때문에 수감자들을 구타했다고까지 증언했습니다. "어떤 수감자들은 빵 배급을 담배와 바꿨는데, 빵이 너무 부족해 질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싶어 때로 매질을 했습니다. 그런 행위를 교도관에게 고발했더라면, 굶주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더 가혹하게 처벌받았을 테니 그 책임은 제게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면 수용소 소장 막스 파울리의 진술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내 생각에 노이엔가메는 가장 잘 조직되고 관리된 강제수용소 중 하나였습니다. 노이엔가메는 1등이었습니다."

왕실 영장(Royal Warrant), 가해자 처벌의 열쇠

재판 과정에서 개별 나치 가해자가 특정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늘 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증명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영국은 1945년 6월 소위 '왕실 영장(Royal Warrant)'에 범죄가 입증된 특정 집단의 개별 구성원 역시 공동 책임을 진다고 규정했습니다. 범행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곧 강제수용소 체계에 가담한 것 자체가 이미 처벌 가능한 범죄임을 의미했으며, 독일 형법 체계에서는 불가능했던 접근이었습니다.

사형 11건, 징역형 3건

1946년 5월 3일, 39일간의 심리 끝에 영국 군사법정은 피고인 14명에 대한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막스 파울리를 포함한 11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들은 1946년 10월 8일 하멜린(Hameln) 교도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발터 퀴멜을 포함한 나머지 3명은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한편 노이엔가메 가해자들을 비롯한 나치 전범들이 안치된 하멜린의 묘지는 수십 년간 노인들과 네오나치의 성지처럼 순례지가 되었고, 1986년에야 평탄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큐리오하우스 재판은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된 범죄에 대한 법적 규명의 초석일 뿐만 아니라, 1946년 당시 이러한 범죄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언급된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충격적인 반응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이엔가메 기념관의 역사학자 라이머 뫼러(Reimer Möller)는 2011년 '타츠(taz)'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인들은 나치 사회의 일원이었고, 이제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존재가 되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자아상과 양립시킬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처벌을 피해 달아났다

큐리오하우스 재판 이후에도 노이엔가메 강제수용소 관련 재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948년까지 영국은 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일한 여성 19명을 포함해 SS 대원 109명을 기소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은 총 142건의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노이엔가메 본소와 위성수용소에서 근무한 SS 인력이 약 4,500명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대부분의 절차는 중단되었고, 불렌후저담 아동 학살에 명백히 연루된 아놀드 슈트리펠(Arnold Strippel)처럼 응징당하지 않고 빠져나간 가해자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