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42년 하노버에서 바르샤바 게토까지 — 피셔호프 역에서 출발한 유대인 추방 열차의 기록

1942년 4월 1일, 유대인 891명을 실은 열차가 하노버 피셔호프 기차역을 떠났습니다. 그 목적지였던 바르샤바 게토는 1940년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간이 된 곳이었습니다.

저자: 디르크 헴펠(Dirk Hempel)

첫 번째 추방: 리가 게토로 향한 1,001명

나치 당국은 이미 1941년 12월 15일, 하노버 출신 정확히 1,001명을 피셔호프 기차역에서 리가 게토로 추방한 바 있습니다. 1942년 3월 말에는 경찰이 추가로 사람들을 강제 연행했습니다. 하노버, 힐데스하임, 괴팅겐, 닌부르크, 바트 피르몬트 등 지역 도시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하노버 북서쪽 알렘으로 끌려왔습니다.

집결지가 된 이스라엘 원예학교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추방을 위해 하노버의 이스라엘 원예학교로 소집되었습니다.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지역 유대인 원예학교는 나치 통치 초기까지만 해도 젊은 유대인 남녀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전 훈련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경찰이 수백 명의 남성, 여성, 아이들로 학교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은 며칠간 그곳에서 기다려야 했고, 옷가방과 꾸러미에 짐을 꾸렸습니다. 당국은 6일치 여행 물품만 휴대를 허용했으며, 보석·예금 통장·현금 같은 귀중품들은 상당수 즉시 압수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추방 열차를 기다리는 몇 시간

3월 31일 저녁, 그들은 하노버-린덴 주거 지역 근처에 있는 피셔호프 기차역으로 이동했습니다. 2층짜리 반목조 역사 뒤편에는 독일군을 위한 전차와 대포를 생산하던 하노마그(Hanomag) 기계공장의 굴뚝과 창고가 서 있었습니다.

겔젠키르헨 발 도이체 국영철도(Reichsbahn) 특별열차 "Da 6"이 오후 6시 15분에 도착 예정이었습니다. 이 열차는 유대인 400명과 경찰 호위 인원을 태울 객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차는 늦게 도착했습니다. 491명은 추위와 비 속에서 승강장 위에서 5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그들을 과밀한 차량 안에 밀어 넣었습니다. 열차는 다음 날 아침에야 브라운슈바이크에 도착해 추가로 109명을 태웠는데, 경찰 지침에 따르면 이 작업에 허용된 시간은 단 11분이었습니다.

유대인 추방으로 돈을 벌어들인 이들

이런 일은 수천 번 반복되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에게서 겨우 몇 벌의 옷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은 뒤, 그들을 열차에 빽빽하게 실어 수용소로 이송했습니다.

독일 전역의 다양한 당국이 추방에 관여했습니다. 하노버에서는 워털루 광장(Waterlooplatz)의 세무서가 추방 대상자들의 자산을 압수했습니다. 린덴 지역 주민들은 공개 경매를 통해 떠난 이들이 남긴 가재도구를 헐값에 살 수 있었습니다. 국영철도 역시 추방 열차 운행으로 수익을 올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재산을 약탈당하는 와중에도 여정 비용 대부분을 스스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성인은 킬로미터당 4페니히, 어린이는 그 절반을 지불했습니다. 나치 정권은 이렇게 모은 돈만 수억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게토 도착: "노인들, 많은 여성들, 어린아이들"

베스트팔렌,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목적지는 바르샤바 게토였습니다. 독일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 게토 내 생활을 관리해야 했던 유대인 평의회 의장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ów)는 밤사이 약 1,000명이 도착해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4월 1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전 10시, 나는 식량 배급 장면을 목격했다. 추방민들은 작은 짐만을 가지고 왔다. 68세 이상의 노인들은 독일에 남을 수 있었다. 노인들, 많은 여성들, 어린아이들."

추방된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들의 이름은 문서와 기념 행사, 그리고 길바닥에 놓인 '넘어짐의 돌(Stolpersteine)'을 통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추방 전까지 랑엔하겐의 '파이어아벤트' 노인 요양원에서 지냈던 막스 블라우리히트(Max Blaulicht). 파텐센 출신 14세 소녀 도라-헬라 모제스(Dora-Hella Moses). 한때 하멜른에서 옷가게를 운영했던 헤르만 함머슬라크(Hermann Hammerschlag)와 그의 아내 비앙카(Bianka). 그들의 딸 헬레네 디나(Helene Dina)는 게토에 도착했을 때 겨우 다섯 살이었습니다.

지옥이 된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 게토에서 그들은 끔찍한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약 40만 명이 이곳 3평방킬로미터 공간에, 때로는 그보다 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높이 3m, 길이 18km에 달하고 철조망으로 보강된 성벽에 둘러싸여 경찰의 치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새로 온 사람들은 한 방에 7~8명씩 살아야 하는 과밀한 주거 환경에 흩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게토 밖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특히 독일 국방군을 위한 생산 공장들은 값싼 강제노동력으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당국은 그들의 죽음조차 계산에 넣고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잔혹하게 통제당했고 음식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공식적인 월 배급량은 겨우 며칠치에 불과했고, 고기도 지방도 없었으며 채소도 거의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발진티푸스와 결핵이 만연했습니다.

거리에 방치된 시신들

밤이면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내와 함께 게토에서 살아남았던 후대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키(Marcel Reich-Ranicki)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길가에는, 특히 아침이면 피로나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낡은 신문으로 겨우 덮여 있을 뿐, 매장 비용을 감당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키, 『나의 삶(Mein Leben)』, 1999

약 8만 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겨울에는 난방이 되지 않는 아파트에서 얼어 죽었으며, 점령군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자조와 저항의 공간이 된 게토

그럼에도 수감자들은 복지위원회를 설립해 무료 급식소, 병원, 노인들을 위한 시설을 마련하고 의류 수집 활동을 조직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 수업도 이루어졌습니다. 예술가들은 콘서트와 낭독회, 연극 공연을 열어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안과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역사가 에마누엘 링겔블룸(Emanuel Ringelblum)은 기록과 보고서를 수집하는 지하 아카이브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게토에서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수많은 책들이 남아 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살해된 의사 야누시 코르차크(Janusz Korczak)의 일기, 게토에 숨어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회고록이 대표적입니다.

트레블링카로의 '이송', 그리고 싹트는 저항

1942년 7월, SS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북동부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까지 SS는 바르샤바에서만 약 28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습니다. 게토에는 6만 명이 남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항을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전투조직을 결성했고, 폴란드 지하군의 도움으로 주로 권총과 폭발물 같은 무기를 확보했습니다. 1943년 1월, 트레블링카로 이송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모으던 중 그들은 처음으로 독일 경비대를 공격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게토의 최후

1943년 4월 18일, 추가 이송 작전을 준비하던 SS 부대가 게토를 포위하자 유대인 전투조직은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전사들은 수 주간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SS는 5월에야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 대부분은 트레블링카와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살해당했으며, 게토의 폐허는 완전히 불태워졌습니다.

피셔호프 기차역과 기억

1944년 1월까지 모두 8대의 추방 열차가 약 2,200명을 싣고 하노버 피셔호프 역을 떠났습니다. 1943년 3월에는 하노버와 인근 지역의 신티족 100명 이상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나치 시대의 모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독일 신티 니더작센 협회는 1996년 오래전 철거된 옛 역사 근처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추방된 이들 가운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4월 1일 피셔호프 기차역에서 출발했던 사람들의 흔적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지워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