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빈츠 부두 붕괴 참사에서 DLRG 창립까지: 1912년 뤼겐의 비극이 바꾼 독일 수상 구조의 역사

독일 생명구조협회(DLRG)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매년 수천 건의 수중 응급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의 뿌리는 한 건의 참담한 사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2년 여름, 뤼겐(Rügen) 섬에서 벌어진 부두 붕괴 사고로 16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 비극이 독일 수상 안전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저녁, 예고 없이 닥친 재앙

1912년 7월 28일은 뤼겐 섬의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당시 빈츠(Binz)는 독일을 대표하는 해변 휴양지로 성수기를 맞아 활기가 넘쳤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해수욕장 부두에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리 위를 오가며 유람선의 정박과 출항을 지켜보았고, 일부는 배를 기다리거나 발트해에 정박해 있는 제국 해군 전함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역 신문 '뤼겐셰 크라이스 운트 안차이게블라트(Rügensche Kreis- und Anzeigeblatt)'의 후속 보도에 따르면, 오후 6시 30분경 증기선 '크론프린츠 빌헬름(Kronprinz Wilhelm)' 호가 다리에 정박해 승객들이 승선과 하선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이 닥쳤습니다. 군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교두보가 무너져 내렸고, 접안 시설이 약 8미터 길이에 걸쳐 붕괴했습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지점의 수심은 약 6미터에 달했으며, 70~80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사고의 비극적인 결과: 16명 사망

1905년 촬영된 빈츠 부두의 모습입니다. 길이는 560미터로, 1994년에 개장한 오늘날의 부두보다 190미터 더 길었습니다.

현장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시 독일 인구의 약 2~3%만이 수영을 할 줄 알았던 것으로 추산되며,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부두 위의 대부분의 방문객은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는 사다리와 기둥을 이용해 희생자들을 구출하려 했고, 증기선 '크론프린츠 빌헬름' 호의 승무원들은 구명벨트와 로프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성 8명, 남성 4명, 어린이 2명 등 14명의 구조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들은 익사했으며, 사고 며칠 후에는 부상을 입었던 두 명의 여성이 추가로 사망하면서 사망자는 총 16명에 이르렀습니다.

리하르트 뢰머의 용감한 구조 작전

추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은 데에는 신속히 도운 해군 장병들의 공헌이 컸습니다. 군의관들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구출된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특히 사고 당시 우연히 근처에 있었던 베스트팔렌 호헨림부르크 출신 하사 리하르트 뢰머(Richard Römer)의 구조 활동은 돋보였습니다.

베를린 근위대에 복무 중이던 뢰머는 주말을 해변에서 보내고자 휴가 허가 없이 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목격한 24세의 청년은 즉각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군복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뢰머는 수영은 할 줄 알았지만, 물에서 사람을 구조하는 요령은 알지 못했습니다. 익사자에게 오히려 붙잡혀 함께 가라앉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는 사람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몸을 밀어 올린 뒤, 무너진 부두 기둥 쪽으로 밀어내 다른 구조자들이 물 밖으로 끌어올리도록 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2명을 구한 뒤의 뢰머는 기력이 고갈되어 들보에 매달린 채 거의 익사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1913년 봄, 카이저 빌헬름 2세는 그의 용감한 행동을 기려 리본이 달린 구조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비극이 낳은 결실: DLRG의 창립

DLRG는 창립 이래 협업을 강조해 왔습니다. 조직은 해변 감시원으로 활동할 새로운 구조요원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빈츠의 비극은 불과 1년여 뒤인 1913년 10월 19일, 라이프치히의 호텔 드 프뤼세(Hotel de Prusse)에서 독일 생명구조협회(DLRG)가 창립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창립된 해가 끝나기도 전인 불과 몇 달 만에 협회는 이미 435명의 회원을 확보했습니다. 강연, 훈련 과정, 대회를 통해 협회는 생명을 구하고 응급 상황을 예방하는 지식과 기술을 대중에게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인명구조요원은 강과 호수에서의 활동을 위해 체계적인 훈련과 평가를 받았으며, 안전 감시 서비스도 구축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리하르트 뢰머는 DLRG에서 일종의 정신적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DLRG에 대한 국가사회주의 세력의 영향

1930년대 초 나치가 권력을 장악해 가던 시기, 그 영향력은 DLRG 내부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수상 구조대의 활동 곳곳에 유입되었습니다. DLRG 자체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1933년 이 조직은 독일 제국 신체단련협회(Deutscher Reichsbund für Leibesübungen) 산하 제5수영전문국에 통합되었습니다. 익사 사망과의 싸움은 여전히 최우선 과제였지만, 이제 '독일 국민의 힘과 군사력을 유지·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수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DLRG는 히틀러유겐트, 독일소녀동맹(Bund Deutscher Mädel), 돌격대(SA), 친위대(SS), 나치당(NSDAP)과 접촉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회원들은 영국과 미국 점령 지역에서 원래의 구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동독이 된 지역에서는 독일 적십자(DRK)의 수상 구조 서비스가 이 임무를 맡았으며, 오늘날에도 DRK는 DLRG와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창립 이후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다

국가사회주의 세력의 개입이라는 어두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DLRG가 철저히 검증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해 온 수상 구조 활동의 성과는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20세기 초반 10년간 독일에서는 연평균 약 5,000명이 물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에는 전국 익사자 수가 417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DLRG는 창립 이래 익사 사망자 수를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수영을 대중적 생활 문화로 자리 잡게 만든 주역이었습니다.

창립 100년이 되는 1913년부터 2013년까지 DLRG 구조요원들은 66,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익사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같은 기간 독일인 중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의 비율은 3%에서 약 80%로 급증했습니다. 다만 DLRG에 따르면, 최근의 변화로 인해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수준의 성인 '바닥 수영자(Non-Swimmer)'가 여전히 상당수 존재한다고 합니다. 1995년부터 니더작센주 바트 넨도르프에 본부를 둔 DLRG에는 약 45,000명의 자원봉사 인명구조요원이 활동 중이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매년 독일 전역의 해안과 수변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