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왜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나?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왜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나?

일본의 세계사 교과서 어디에도 '파르살루스 전투'—로마 역사상 최대의 전쟁—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니케아 공의회를 다루지 않는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습니다.

로마의 운명보다 기독교 교리를 확정한 회의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세계사에서 이 회의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흔히 'WASP'라고 불립니다.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의 약자입니다. 영국과 미국을 지배해 온 집단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 역시 자연스럽게 그 영향권 안에 놓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사'는 일종의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 가운데 기독교 전통과 무관한 곳은 찾기 어렵고, 오늘날 선진국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서기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제1차 니케아 공의회)'만큼 중요한 사건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니케아 공의회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기 쉽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로마 황제가 소집한 회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 제국의 역사는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반포될 때까지 끊임없는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Christ)'는 유대교에서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며, 기독교는 예수를 구원자로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 예수는 로마 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 사이에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는 점만큼은 확실합니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네로 황제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군인 황제 시대까지 국가 차원의 박해는 없었고, 주로 민간 수준에서 상당한 박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국가 차원의 박해를 시작한 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입니다. 그는 '황제 = 신'이라는 전제군주제(도미나투스)를 추진했는데,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의 존재는 그에게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하자 내전이 발발했고, 그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내전을 승리로 이끈 콘스탄티누스는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는데, 로마 신들을 모시는 신전 대신 기독교인들을 위한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대박해가 서기 303년이었으니,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문자 그대로 '국민'의 지위를 얻은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 회의를 주관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공(公)'에는 황제가 열어주는 회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전례 없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로마 황제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으로서 유피테르와 마르스 등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건설 등을 포함해, 콘스탄티누스는 흔히 '로마를 파괴하고 중세를 만든 인물'로 불립니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 자신도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무엇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나?

니케아 공의회의 핵심 의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도 '예수는 인간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서는 그런 주장을 펼친 사람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바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 이미 약 300년이 흘렀습니다. 긴 세월 동안 교리 해석은 자연스럽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성부(하나님)와 성령과 예수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했습니다.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는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학설대로라면 예수의 부활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부활하지 않으니까요.

곁가지 이야기지만, 지인 중에 5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계속할지 고민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는 부활하지 않는다—슬프지만 누구나 아는 상식과 정반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받아들이면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형용하기 어려운 공포였습니다. 역사란 무엇이고, 사실이란 무엇이며, 이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사제와 목사, 교황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신이라면, 부활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즉 '예수는 신이다'라고 규정한 결정—그것이 바로 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내려진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승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의 학설을 채택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예수는 공식적으로 '신'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인 로마 황제가 인정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권위는 없었습니다.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는 로마 제국에서 축출되었고, 추방된 아리우스는 게르만 민족에게 전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게르만족의 기독교화로 이어졌고, 오늘날 영국·독일·미국을 지배하는 계층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훗날 종교개혁이 영국과 독일에서 확산된 것은 교황 중심의 카톨릭에 대한 반격이었지만, 그 씨앗은 이미 이 무렵에 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은 국교회를 세웠고,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전했으며, 그것이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로마는 세 번 세계를 지배했다. 첫째는 군사력으로, 둘째는 법으로, 셋째는 기독교로.”

현대 세계를 실질적으로 만든 것은 로마 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지배, 즉 기독교에 의한 지배의 시대는 바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