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스파르타쿠스』가 말해주는 것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가장 뛰어난 걸작을 꼽으라면 단연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하고 커트 더글러스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Spartacus, 1960)』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로마'라는 단어를 빼더라도 세계 영화사 베스트 100에 당당히 들어갈 작품입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토니 커티스 등 화려한 출연진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이라는 소재 자체가 지닌 극적인 힘이 이 영화를 명작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출생에 대해서는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트라키아(현재 발칸반도 일대)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많지 않습니다.
반란 이전에 검투사 노예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본래 트라키아 출신 군인이었으나 로마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검투사 중에는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해 스스로 지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로마와 싸우다 패배해 포로가 된 자들이 검투사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용병 출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스파르타쿠스 역시 한때 로마와 적으로 싸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출신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고, 왕족의 혈통일지 모른다는 의견까지 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훗날 정규 로마군마저 꺾을 정도의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준 점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단순한 평민이나 일개 용병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시작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수십 명의 검투사들이 카푸아의 검투사 훈련소(바티아투스의 훈련소)를 탈출했습니다. 그들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한 뒤 베수비오 화산에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있던 바티아투스 훈련소에는 약 200명의 검투사가 지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마자 인근의 노예들과 몰락한 농민들이 베수비오 화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하나의 군대로 조직될 수 있었습니다.
노예라 하면 족쇄에 묶여 채찍질당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로마는 기본적으로 노예 사회였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대체로 다수의 노예를 부렸는데, 면도를 담당하는 노예, 요리를 하는 노예 등이 있었고, 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돈을 모아 해방 노예가 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가담한 대다수는 기존 질서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시칠리아에서 값싸고 질 좋은 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중소 농민들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급증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베수비오 화산의 스파르타쿠스에게 몰려들면서 반란은 대규모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사람들을 탁월하게 규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런 유형의 반란군은 대부분 약탈에 그치며 무질서하고 규율 없이 흩어지기 마련이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그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체계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로마군을 연파하다
물론 로마가 이런 상황을 방치할 리 없었습니다. 원로원은 법무관(프라이토르)급 장군인 글라베르를 파견했지만 그의 군대는 궤멸당했고, 이어 같은 등급의 바리니우스가 파견되었음에도 스파르타쿠스 앞에서 손발 쓸 겨를도 없이 패배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지휘관이 누구든 간에 그리스, 아프리카,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의 세력을 거의 전승에 가깝게 상대해 왔습니다. 충분한 무장조차 갖추지 못한 반란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스파르타쿠스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원로원은 로마 최고위 직책인 집정관(콘술) 두 명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두 로마군의 협공을 성공적으로 분리해 각개격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 진영의 공동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크릭수스가 전사했는데, 로마군 포로들을 검투 경기를 시켜 그를 추모했다는 일화가 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람에게 행한 일은 언젠가 되돌아온다'는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세 번째 인물, 크라수스의 등장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적역은 물론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한 크라수스입니다.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서 군사권을 회수하고, 훗날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실시하게 되는 크라수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습니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비하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을 서서히 몰아붙이며 승패를 거듭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고, 반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스파르타쿠스군의 진로는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비합리적인 움직임으로 유명합니다.
↓ 기원전 73년부터 72년까지의 행보

↓ 기원전 72년의 진로

남쪽으로 갔다 싶으면 북쪽으로 향하고,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싶으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신비로운 행보였습니다.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와 연합하려 했다는 설, 함대가 마중 나오기로 했으나 오지 않았다는 설, 해적에게 돈을 지불했으나 해적들이 약속을 깨버려 결국 북상해 알프스를 넘으려 했다는 설 등 고대부터 다양한 견해가 전해지지만, 진군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크라수스와의 최종 전투에 대해서도 크라수스가 단독으로 격파했다는 기록과, 히스파니아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가 진압했다는 기록이 공존합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스파르타쿠스가 패배했으며, 다수의 반란군이 시범을 위해 십자가형에 처해 아피아 가도를 따라 줄지어 늘어섰다는 사실입니다.
크라수스는 이 사건으로 이름을 떨쳤고 훗날 로마 정치를 주도하게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끝내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에는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이 로마 병사의 질문 "누가 스파르타쿠스인가?"에 잇달아 일어나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이를 울린 것으로 유명한 명장면입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돌아보며
록앤롤이 반항의 음악이라 할 수 있듯, 스파르타쿠스는 반항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카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평했고, 이는 독일의 급진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단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큐브릭 외에도 스파르타쿠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있으며, 소설과 드라마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스파르타쿠스가 어떠한 약탈과 약취도 허용하지 않고 약자와 함께 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함으로 이름난 정규 로마군을 꺾은 몇 안 되는 세력이었고, 지휘관으로서도 최정상급 능력을 지녔을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진압 이후 로마에서는 대규모 노예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반란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노예 반란에 이은 일련의 노예 반란의 일부로서 '제3차 노예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는 한니발과 함께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스파르타쿠스가 온다"고 하면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고 전해집니다.
이기면 정부군, 지면 도적군.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바라보며 문득 이 말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