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지배와 롬바르드의 반란
비잔티움 제국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남부에 영토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1009년, 바리의 롬바르드 통치자 멜리스(Melis, 멜로라고도 불림)가 제국에 대한 봉신 관계를 깨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잔티움은 즉각 대응하여 1011년 바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멜리스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베르토 부아테레(Gilberto Boatere) 휘하의 노르만 용병 부대를 끌어들이고 교황의 지원까지 확보한 뒤, 1017년 포르토레 강 전투에서 비잔티움군을 격파하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의 강력한 대응
황제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Basilios II Bulgaroktonos, '불가르인 학살자')는 즉시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을 교체했습니다. 새로 임명된 인물은 황제가 가장 신뢰하던 장군 중 한 명인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니스(Vasilios Boioannes)였습니다. 그는 정예 바랑기아 근위대 분견대로 증원을 받았고, 곧바로 적진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칸네에서 벌어진 결정적 대결
보이오안니스는 오판토(Ofanto) 강변에서 적과 마주쳤습니다. 바로 기원전 216년 한니발이 로마군을 궤멸시켰던 그 칸네(Cannae) 지역이었습니다. 전투의 구체적인 경과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롬바르드와 노르만 연합군이 문자 그대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노르만 지도자 길베르트(Gilbert)는 병사 대부분과 함께 전사했으며, 살아남아 도피한 기사는 단 10명에 불과했습니다. 승리 직후 보이오안니스는 아펜니노 산맥의 요충지에 견고한 요새를 축조하여 아풀리아 평야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교황의 개입과 게르만 황제의 원군
이후 보이오안니스는 멜리스의 사위이자 동맹인 다도(Dato)의 거점인 가릴리아노(Garigliano)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다도는 스스로 자루에 몸을 묶어 바다에 뛰어들어 생을 끝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8세는 게르만 황제 하인리히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황제는 이를 수락했으나 행동은 매우 더디었습니다. 간신히 탈출해 게르만 궁정에 피신했던 멜리스는 1020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르만군은 마침내 비잔티움령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오안니스는 1027년 해임될 때까지, 위대한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서거한 지 2년 후까지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티움 정복 사업을 탁월하게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들은 그에 미치지 못했고, 이윽고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내 존재감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필리오퀘' 논쟁과 동서 교회의 균열
주목할 만한 점은, 교황 베네딕토 8세가 하인리히에게 황제 관을 씌운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게르만 황제의 요구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신앙 고백서에 '필리오퀘(Filioque,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온다는 교리)' 조항을 정식으로 추가한 인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결정은 훗날 동서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비잔티움 보병을 재현한 그림. 최전선 열에 바랑기아 근위대가 배치된 모습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