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개혁과 붕괴의 7년 (1985~1991)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개혁과 붕괴의 7년 (1985~1991)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로 재임한 러시아 정치인입니다. 소련 공산당의 떠오르는 실력자로 성장한 그는 당 서기장에 오르며 당시 제2의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운명을 짊어졌습니다. 전임자들과 뚜렷이 대비되는 젊은 나이(54세)와 현대적인 이미지를 지닌 그는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지지하는 온건파로 평가받았습니다. 소련 체제 전반을 대대적으로 손질하며 동구권 정치 지형을 흔든 개혁,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했지만, 커져만 가는 사회·정치적 저항 속에서 소련 체제의 구원과 사회주의 내부 개혁에 집착한 나머지 소련 붕괴라는 결과를 맞이했고, 결국 1991년 12월 25일 강제로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고르바초프, 당 조직을 타고 오른 경력

1931년 3월 2일 러시아 스타브로폴 인근에서 태어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검소한 가정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했으며, 철학도 학생이었던 라이사 티토렌코와 결혼했습니다. 1952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 소련 체제의 순수한 산물로서 모든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갔습니다. 1970년 최고 소비에트에 합류했고, 이어 197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농업 담당 각료를 거쳐 1980년 드디어 정치국에 들어섰으며, 곧바로 브레즈네프의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개혁과 붕괴의 7년 (1985~1991)그러나 너무 젊었던 탓에 고르바초프는 최고 자리에 오르기 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라는 노(老)지도자 시대를 지나야 했습니다. 마침내 1985년, 그는 소련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해 당과 국가 운영의 실권을 쥐게 되었고, CPSU(소련 공산당) 조직을 근본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현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통치 스타일은 전임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지만, 소련의 '젊은' 지도자는 곧 낙관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숨 막히던 체제, 개혁의 시작

고르바초프가 물려받은 나라는 이미 위기 상태였습니다. 소련은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경제 적자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소련 블록 내 반체제 운동의 확산과 제3세계에서의 영향력 쇠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생산성 절반 수준으로의 추락, 농업 침체, 군수산업복합체가 차지하는 과도한 비중, 미국에 비해 뒤처진 과학기술, 만성적인 보건 문제 등 조국 경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소련을 이 악물고 구원하기 위한 야심 찬 개혁 계획을 내놓습니다.

당 조직의 반발을 무릅쓰고 크렘린이 채택한 새로운 어조는 소련의 구조적·사회적·경제적 경직성을 직격했습니다. 관료주의와 부패를 감싸던 침묵의 법칙을 깨고, 국가의 새로운 신뢰성을 보여주겠다는 슬로건 '투명성', 즉 글라스노스트가 예고되었습니다. 1987년부터는 언론의 자유로의 회귀를 허용했고, 불과 1년 뒤에는 반체제 인사들과 스탈린 숙청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재활)을 단행했습니다.

1986~1987년에는 시장과 사유재산의 역할을 인정하는 경제 개혁을 착수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1988년 일당 독재 체제를 폐지하며 정치 게임의 자유화를 열었습니다.

서구에서 사랑받은 지도자…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국내보다 국제 무대에서 빛났습니다. 그야말로 냉전을 무덤에 묻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데탕트는 일련의 무기통제 협정 서명으로 구체화되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와 전쟁 종결부터 핵군축에 이르는 화려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1985~1991)에 걸쳐 진행된 이 과정에서, 동시에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은 고르바초프식 정치 운영을 본떴습니다. '고르비(Gorbi)'의 개혁 행보와 반체제 운동에 대한 그의 묵인은 공산 정권의 종말을 가져온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그는 막으려 하지 않았고, 헬무트 콜이 주도한 독일 통일 역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개혁과 붕괴의 7년 (1985~1991)1990년 고르바초프는 그간의 국제적 활동 전반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소련 붕괴로 향하는 길

같은 해 그는 소련의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당이 아닌 공화국 입법부로 권력 기반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여전히 악화되는 중이었고, 페레스트로이카는 설득력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강한 정치적 압력에 직면합니다. 강경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권력 독점 상실에 분노했고, 시장경제 옹호자들은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민족주의자들은 각 공화국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1991년 6월 12일 보통선거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보리스 옐친과의 권력 경쟁에 내몰립니다. 1991년 8월 19일, 크림 반도의 다차에서 휴가를 보내던 고르바초프는 보수파 공산주의 간부들이 주도한 쿠데타 시도의 희생자가 됩니다. 옐친과 개혁 지지 세력은 이 음모에 맞서 3일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돌렸습니다. 덕분에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는 육체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크게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사임

공산당 조직 내부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고, 이제 누구도 소련 해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91년 12월 말, 이미 법적 허구에 불과해진 소련은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12월 25일 황혼 무렵,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마지막 방송 연설을 통해 사임을 발표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CPSU의 권력 독점을 종식시키면서, 고르바초프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등 야당 세력이 목소리를 내고 승리할 길을 스스로 열어주었습니다. 개혁의 혼란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국민들의 지지 또한 얻지 못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복귀론자와 '붉은 제국' 해체론자 사이에서 고르바초프의 중도 노선은 끝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입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개혁과 붕괴의 7년 (1985~1991)민간인으로 돌아간 고르바초프는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로 정계 복귀를 시도했지만 대참패를 당했습니다. 소련의 '무덤 파는 자'로 여겨진 그는 조국에서 여전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주로 재단 활동과 집필에 매진했으며, 해외에서 수많은 강연과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2019년에는 정치적 유언장 격인 저서 『세계의 미래』를 출간해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험과 지구 온난화의 파괴적 결과를 경고했습니다.

참고문헌

- 베르나르 르콩트, 『고르바초프』 전기. 페랭(Perrin), 2014.

- 미하일 고르바초프, 『회고록』. 에디시옹 뒤 로셰(Editions du Rocher), 1995.

- 헬렌 카레르 dang앙코스(Hélène Carrère d'Encausse), 『세상을 바꾼 6년 1985-1991: 소련 제국의 몰락』. 파야르(Fayard),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