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의 기사단처럼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중세 영국의 기사도·영웅담,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최근 국제 공동 연구에 따르면 중세 기사도와 영웅담을 담은 사본의 90% 이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롭게도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의 중세 이야기는 4분의 3 이상이 현존하는데, 이는 섬이라는 독특한 '문화 생태계'가 보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특이한 패턴입니다.
살아남은 책만으로 과거를 논할 수 있을까? '생존 편향'의 함정
중세 유럽 문화의 핵심이었던 방대한 문학 유산은 도서관 화재, 의도적 폐기, 양피지의 창의적 재활용 등으로 인해 대거 소실되었습니다. 문제는 학자들이 현존하는 문헌이 한때 존재했던 전체를 어느 정도 대표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생존 편향(survival bias)'은 중세 사회의 문화적 생산 다양성을 과소평가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생태학 통계 모델로 잃어버린 책의 수를 계산하다
옥스퍼드대학교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 연구팀은 생태학에서 사용되는 통계 모델을 문화유산 연구에 적용해 유럽 각 지역의 귀중한 유물과 이야기의 손실률·생존률을 추정했습니다. 이 접근법은 기존 연구를 보완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며, 그 성과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Science에 게재되었습니다(수석 저자: 앤트워프대학교 Mike Kestemont, KNAW Meertens Institute Folgert Karsdorp).
옥스퍼드 링네어 칼리지(Linacre College) 후배 연구원이자 고대 노르드어 문헌학자인 카타지나 안나 카피탄(Katarzyna Anna Kapit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태학에서 차용한 통계 방법을 활용해 기존 지식을 한 단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 이야기와 영웅담을 보존하고 있는 중세 사본의 90% 이상이 손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문헌사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산출한 추정치와도 대체로 일치합니다. 또한 중세 기사도·영웅 작품 자체는 약 32%가 수 세기에 걸쳐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팀은 생태학에서 종 다양성 추정에 쓰이는 '보이지 않는 종 모델(unseen species model)'을 적용했습니다. 아서 왕 로맨스, 용 퇴치자 시구르드(Sigurd), 전설적 통치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Ragnar Lothbrok)의 영웅 서사시처럼 TV 시리즈 '바이킹스'로도 대중에게 익숙한 중세 유럽 이야기들의 손실과 생존 규모를 추정한 결과, 부족한 역사적 증거와도 잘 들어맞았습니다.
언어에 따라 다른 운명: 아일랜드 81% vs 영어 38%
분석 결과, 언어권별 생존율에는 놀라운 격차가 드러났습니다. 중세 이야기 문학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은 아일랜드 전통, 반면 가장 심각한 손실을 입은 것은 영어 작품이었습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아일랜드 중세 로맨스·모험담의 약 81%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만, 영어로 된 유사 작품은 38%에 불과합니다. 사본 기준으로도 중세 아일랜드 사본의 약 19%가 현존하는 반면, 영어 사본은 7%에 그칩니다.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Merton College)의 중세 영문학 피츠제임스(Fitzjames) 연구원 다니엘 소여(Daniel Sawyer) 박사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세 영문 소설의 예상 생존율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도서관을 흩어지게 만든 헨리 8세 시대의 수도원 해체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지만, 애초에 수도원·수녀원 도서관 목록에 영어 영웅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소여 박사는 당시 영어의 낮은 위상을 또 다른 가능한 설명으로 제시합니다. '오늘날 영어는 전 세계에서 제2언어로 학습되지만, 중세에는 국제적 중요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어는 권력과 문화의 국제어로서 잉글랜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랑스 영토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 왕실의 소유였습니다.'
실제로 영어 증거에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로 쓰인 로맨스를 함께 포함하면 생존율은 다른 언어권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됩니다. 이는 노르만 프랑스어가 잉글랜드 문화에서 차지한 중요성을 보여주며, 노르만 프랑스어와 영어 영웅담이 하나의 연결된 전통을 형성했음을 시사합니다.

섬의 '문화 생태계'가 남긴 기적: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
카피탄 박사는 아이슬란드의 경우 상황이 매우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중세 아이슬란드의 로맨스·모험담 4편 중 3편(77%)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정작 현존하는 중세 사본은 6개(17%)에 불과합니다.'
도서관 화재나 서적 재활용 같은 사건 외에도, 연구팀은 고대 유물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간과된 요인으로 문화 생산의 원래 '균일성(uniformity)'을 확인했습니다. 카피탄 박사는 '아이슬란드어 텍스트와 아일랜드어 텍스트 사이에서 흥미로운 유사점이 밝혀졌습니다. 두 전통 모두 중세 작품과 사본의 생존율이 높을 뿐 아니라 균일성 프로필도 매우 비슷합니다. 즉, 살아남은 사본의 평균 수가 조사된 다른 전통보다 더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라며, '이는 인쇄기 발명 이후에도 오랫동안 문학 텍스트를 손으로 베껴 쓰던 전통이 지속된 탓일 수 있습니다'고 덧붙입니다.
소여 박사는 '이 증거는 중세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의 연관성,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럽 문화가 영어 창작에 끼친 영향을 보여줍니다. 잉글랜드의 규모와 대륙과의 긴밀한 관계는 영어 텍스트에서 아일랜드·아이슬란드 같은 섬 지역 특유의 균일성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라고 분석했습니다.
학제간 융합이 여는 유산 과학의 미래
이번 분석이 더욱 확장되기 위해서는 유산 과학(heritage science) 분야에서 해당 방법론의 광범위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연구자들은 학문 분야 간 협력이 매우 고무적이었다는 데 의견을 모읍니다. 카피탄 박사는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별 필사본이나 문헌에 대한 일화적 사례 연구를 넘어, 다양한 장소·전통·언어를 폭넓게 비교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출처
옥스퍼드대학교 | Mike Kestemont, Folgert Karsdorp, Elisabeth de Bruijn 외, Forgotten books: The application of unseen species models to the survival of culture. 2022, Science vol.375, no.6582, pp.765-769. DOI:10.1126/science.abl7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