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달 중 하나였다. 덩케르크 철수, 프랑스의 독일 항복, 6월 22일 휴전 협정 체결 등 결정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히틀러의 승리를 의미했고, 영국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내몰았다. 무엇보다 프랑스 해군(Marine Nationale)이 나치의 수중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는데, 당시 세계 4위 규모의 전력이었다. 이에 처칠은 프랑스 함대 무력화라는 결단을 내렸고, 그것이 '캐터펄트 작전(Operation Catapult)'의 시작이었다.
휴전 협정 속 함대 처분 조항과 각국의 속셈
컴피에뉴 숲의 열차 안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 24개 조항에는 프랑스 전함들을 자국 항구에 정박시키고 비무장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으로 피신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 무솔리니는 이 함대들을 이탈리아 해군(Regia Marina)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프랑스를 지나치게 자극해 끝까지 저항하게 만들거나, 지중해 제해권을 이탈리아에 넘겨줘 스페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함대 처분 권한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권에 남겨두는 것으로 결론 났다.
다를랑의 약속과 처칠의 불신
해군 참모총장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은 "독일이 함대 인도를 요구하면 자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친독 성향이 강했고, 영국이 결국 추축국에 패할 것이라 믿었기에 함대를 영국 항구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처칠은 Royal Navy의 힘으로 본토 방위는 가능하지만, 프랑스 함대가 Kriegsmarine에 합류하면 대서양 보급로가 차단돼 치명타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이를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이라 부르며 캐터펄트 작전을 명령했다.
작전 개시: 본토 항구에서의 접수 (7월 3일)
작전은 7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 플리머스·포츠머스·지브롤터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함정을 장교들의 만찬을 틈타 접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전함 파리·쿠르베 등 구형 함정 다수가 별다른 저항 없이 넘어갔으나, 구축함 르 미스트랄과 세계 최대 잠수함 쉬르쿠프에서 저항이 있어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비극의 정점 (7월 3일 오후)
같은 날 오후, 오랑 항구 메르스엘케비르에서 작전 중 가장 치열한 충돌이 벌어졌다. 마르셀브뤼노 장수 제독 휘하 프랑스 함대(전함 4척, 항공모함 1척 등) 앞에 제임스 서머빌 제독의 H함대(항모 아크 로열, 전함 2척, 순양전함 1척 등)가 나타났다. 서머빌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나 미국으로 출항하거나, 자침하라. 그렇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협상이 결렬되자 영국 함대는 항구 안에 갇혀 기동 못하는 프랑스 함정을 포격했다. 전함 브레타뉴가 침몰하고 프로방스, 덩케르크가 대파됐으며, 구축함 모가두르 등도 피해를 입었다. 스트라스부르만 툴롱으로 탈출했다. 프랑스 측 사망자 1,295명, 영국 측 2명이라는 압도적 차이의 전투였다. 비시 정권은 영국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지만, 드골은 이 행동을 지지하며 자유 프랑스의 명분을 세웠다.
알렉산드리아: 무력 충돌 없는 해결 (7월 4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앤드루 커닝엄 제독과 르네에밀 고프루아 제독이 대치했다. 커닝엄은 지인인 고프루아에게 합류, 자침, 무장해제 후 잔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했다. 양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도 고프루아는 열세를 인정하고 무장해제를 택했다. 연료를 비우고 포신 핵심 부품을 분리했으며, 사병 4분의 3이 하선했다. 이 함대는 1943년 7월 연합국 측에 합류했다.
다카르와 카리브해: 리슐리외 공격과 미국의 중재
7월 8일, 세네갈 다카르에는 최신 전함 리슐리외가 정박해 있었다. 영국은 최후통첩 후 항모 허미즈의 소드피시 뇌격기를 출격시켜 리슐리외에 손상을 입혔고, 9월 '다카르 작전' 중 2차 공격으로 10개월간 전투 불능 상태가 됐다.
카리브해에서는 항모 베아른과 순양함 잔 다르크, 에밀 베르탱이 프랑스 중앙은행 금 300톤을 캐나다로 수송 중이었다. 루아예르 제독 휘하 이 함대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 "함정 고정화"를 중재함으로써 영국 공격을 면했다. 이들은 1943년 6월까지 마르티니크에 억류됐다.
그 밖의 지역과 작전 결과
카사블랑카의 장 바르, 툴롱, 알제 등의 함정은 요새화된 항구라 공격하지 않았다. 반면 캐나다, 수에즈, 싱가포르, 크레타 등지의 함정은 나포·자침 처리됐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은 주력함 7척을 포함해 전력의 3분의 1을 잃었다.
작전의 그늘: 앙금과 부작용
이 작전은 비시 프랑스와의 사실상 전쟁 선포나 다름없었다. 식민지 프랑스인들 사이에 반영 감정이 고조돼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지원 병력이 줄었고, 프랑스 장교들은 연합국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비시 정권에 협력하게 됐다. 피에르 라발은 10월 모와브르 회담에서 이를 협력 정책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7월 12일 영국은 전략을 수정, 식민지 수역 내 프랑스 함정 항해를 허용하고 추축국 지배 항구로 향하는 함정만 차단하기로 했다. 프랑스 해군은 1943년까지 추축국과 해상에서 교전하지 않았으며, 시리아·마다가스카르(아이언클래드 작전)·북아프리카 상륙전에서는 오히려 연합국과 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