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퀴리테스(Quirites): 로마인과 사비인의 융합이 낳은 로마 시민권의 원형

로마성(로마니타스)을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키비타스(civitas), 즉 시민권이었다. 제국의 모든 도시 주민들이 갈망했던 이 지위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구체적인 권리의 집합이었다. 선거 참정권(suffragii), 공직 진출권(honorum), 재산 소유 및 계약 체결권(commercii)은 물론 다양한 법적 혜택까지 포함되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시민권의 기원은 기원전 8세기에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하나의 신화적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사비 여인들의 납치'와 그 후속 합의였다. 이 합의는 전쟁을 막고, 양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퀴리테스(quirites)라는 동일한 지위를 갖는 양두정치(二頭政治)를 탄생시켰다. 퀴리테스야말로 시민권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로물루스의 계략, 사비 여인 납치 사건

전설에 따르면 초기 로마는 여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생 레무스와 함께 도시를 세우고 초대 왕이 된 로물루스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를 기리는 경기를 개최하고 주변 마을들에 참가를 초청했다. 이에 응한 곳 중 하나가 라티움 산악 지대의 사비움이었고, 그들은 가족을 데리고 행차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로물루스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경기가 한창일 때 그는 미리 정해둔 신호를 보냈고, 로마인들은 사비 여인들을 납치하고 그들의 남편과 가장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았다. 로마인들은 아내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강력한 이웃의 분노를 샀다. 사비인들은 1년에 걸쳐 복수심을 조용히, 그러나 냉혹하게 키워나갔다.

퀴리테스(Quirites): 로마인과 사비인의 융합이 낳은 로마 시민권의 원형

타르페야의 배신과 쿠르키우스 호수의 전투

드디어 사비인들은 전쟁을 선포하며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신화에는 언제나처럼 배신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로마 여인 타르페야(Tarpeya)는 "네가 팔에 안고 있는 것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적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팔에 차고 다니던 금 팔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사비인들은 그녀의 비열함을 경멸한 나머지 팔에 안고 있던 또 다른 물건, 즉 방패로 그녀를 깔아뭉갬으로써 값을 치렀다.

그녀가 쓰러진 장소는 훗날 타르페야 바위(Rupes Tarpeia)라 불리게 되었고, 반역죄인들이 처형되던 처형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양군은 쿠르키우스 호수에서 격돌했지만 승패는 좀처럼 기울지 않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변수는 무기가 아니라 여인들이었다. 상복을 입은 사비 여인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외쳤다. 한쪽이 승리하면 지금의 남편을 잃게 되고, 다른 쪽이 승리하면 친정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로써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양두정치의 시대와 티투스 타티우스의 최후

이리하여 로마인과 사비인은 이중 군주제를 수립했다. 로마인은 로물루스가, 사비인은 그들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가 대표했다. 타티우스는 딸들의 혼인으로 동맹을 공고히 했다. 에르실리아를 로물루스에게, 그리고 훗날 로마의 제2대 왕이 되는 누마 폼필리우스에게 타티아를 시집보낸 것이다.

이 공동 통치는 5년간 지속되다가 기원전 745년경 두 왕 사이의 불화로 끝을 맞는다. 발단은 일부 사비인들이 로렌툼 사절단을 괴롭힌 사건이었다. 로물루스가 가해자들을 피해 측에 인도하자, 타티우스는 무력으로라도 그들을 되찾으려 했고, 결국 종교 의식 중에 살해당했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석방을 탄원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로마인들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한다. 이후 로물루스가 단독 통치자로 남았다.

퀴리테스(Quirites): 로마인과 사비인의 융합이 낳은 로마 시민권의 원형

티투스 타티우스는 왕의 목록에 없다

오늘날 학계는 티투스 타티우스를 실존 인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플라비예 사제단(Titii sodales)의 명칭이 된 에포님, 즉 공화정에 흡수되기 전 이탈리아 고유 숭배 전통의 생존을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되며, 혹은 집정관이라는 이중 관직의 탄생 과정을 은유한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티우스는 로마의 일곱 왕 목록에서 빠져 있다.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에 이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그리고 '교만한 자' 타르퀴니우스까지, 이 일곱 왕은 기원전 753년부터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개막한 기원전 509년까지 로마를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퀴리테스', 그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그럼에도 이 양두정치가 남긴 결정적 유산이 있었다. 로마는 여전히 로마, 사비움은 여전히 사비움이라는 이름을 유지했지만, 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로 융합되어 퀴리테스(quirites)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로물루스 편에서 티투스 타티우스의 출생지인 사비 도시 퀴레스(Cures)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했고, 리비우스 역시 『로마사』에서 이 견해를 지지했다. 한편 여신 유노의 신성한 창인 퀴리티스(Quiritis, 혹은 Kiris)에서 왔다는 구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퀴리테스(Quirites): 로마인과 사비인의 융합이 낳은 로마 시민권의 원형

그러나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 단어가 co-uiri-um, 즉 '남자들의 회합'을 뜻하는 데서 왔다고 본다. 이 회합이야말로 쿠리아(curia)의 씨앗이었다. 정확히는 복수형인 curiae인데, 처음에는 30인으로 구성된 중앙 쿠리아(원로원의 모태가 된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있었고, 파트리키들이 해당 부족에 편입되면서 통합된 하위 쿠리아들이 존재했다.

로마 사회는 세 개의 부족, 즉 라므네스(Ramnes), 티티엔세스(Titienses), 루케레스(Luceres)로 조직되었다. 학자들 사이 이견은 있지만, 첫째는 로물루스와 라틴인을, 둘째는 티투스 타티우스와 사비인을, 셋째—어원이 불분명한—는 에트루리아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각 부족은 10개의 쿠리아로, 각 쿠리아는 10개의 게ns(혈족 집단)로, 각 게ns는 다시 10개의 가족으로 구성되는 정연한 위계 구조를 이루었다.

로마법 속에 새겨진 유스 퀴리툼

어느 설이 옳든, 유스 퀴리툼(Ius Quiritum)이라는 개념은 로마법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완전한 표현은 populus Romanus quirites(로마 국민 퀴리테스)였으며, 이는 시민 간의 관계를 규율하고 앞서 언급한 각종 권리를 부여한 입법 체계인 유스 키빌레(Ius Civile)가 정한 요건을 충족한 자들을 가리켰다.

흥미롭게도 '퀴리테스'라는 호칭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단어는 국내 문제에만 사용되는 표현으로 축소되었고, 대외 관계에서는 '로마니(Romani, 로마인)'라는 명칭이 쓰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바로 이 '로마인'이라는 호칭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