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단 10일 만에 라인강 위에 세운 카이사르의 다리, 18일 만에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기원전 55년 초여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에 나선 지 3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 새로 정복한 영토의 동쪽 경계는 라인강에 닿아 있었고, 강 동쪽에 웅크리고 있던 게르만 부족들은 이 자연 방벽을 등에 업고 서쪽으로 끊임없이 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강 건너편에는 유비오스(Ubii)처럼 로마와 동맹을 맺은 부족도 있었습니다. 유비오스는 군단이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응징할 수 있도록 카이사르에게 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단 10일 만에 라인강 위에 세운 카이사르의 다리, 18일 만에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강 위에 다리를 놓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맹국 유비오스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마가 원하는 때라면 언제든 국경 너머로 진격할 수 있다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배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직접 언급했듯이, 이는 그 자신과 로마 시민의 명예에도 더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단 10일 만에 라인강 위에 세운 카이사르의 다리, 18일 만에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공사는 현재의 안데르나흐(Andernach)와 코블렌츠(Koblenz) 하류 사이, 노이비트(Neuwied) 인근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구간은 강의 깊이가 최대 9미터에 달하는 험한 곳이었습니다. 양쪽 강둑에는 출입구를 지키기 위해 망루가 세워졌고, 상류에는 적의 공격과 급류가 실어 오는 부유물로부터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말뚝과 방벽이 설치되었습니다.

카이사르 휘하 4만 명의 병사들은 거대하고 무거운 돌을 망치처럼 내려쳐 강바닥에 박힌 이중 나무 기둥을 고정했고, 단 10일 만에 다리를 완성했습니다. 이 공법은 물살이 세일수록 다리 부재들이 서로 더 단단히 결합되도록 설계된, 당대 최고 수준의 공학이 집약된 구조였습니다.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이 혁신적인 교량 공법을 설계한 엔지니어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키케로(Cicero)는 편지에서 그의 이름을 '무마라(Mumarra)'라고 언급했지만, 카이사르와 함께 행군하며 유명한 『건축에 관한 10권의 책』을 저술한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완성된 다리의 길이는 약 140~400미터, 폭은 7~9미터로 추정됩니다.

다리가 완성되자 카이사르는 군단을 이끌고 유비오스가 기다리던 강 건너편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도착 후 그는 시캄브리(Sicambri)족과 수에비(Suebi)족이 자신의 도착을 예감하고 이미 동쪽으로 물러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정은 결국 대규모 전투 없이 끝났고, 일부 마을을 불태운 뒤 카이사르는 회군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갈리아로 돌아오며 등 뒤에 남긴 다리를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다리가 강 위에 서 있었던 시간은 고작 18일이었습니다.

단 10일 만에 라인강 위에 세운 카이사르의 다리, 18일 만에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2년 후, 역사는 반복됩니다. 첫 번째 다리 자리에서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현재의 우르미츠 Urmitz 옆으로 추정)에서 카이사르는 두 번째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이번에는 공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 수에비족은 다가올 운명을 눈치채고 동쪽으로 후퇴해 마을을 버리고 숲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돌아오며 다시 다리를 파괴했지만, 이번에는 동쪽 강안에 닿는 끝부분만 잘라내고 나머지 다리를 지키기 위해 방어 탑을 세웠습니다.

단 10일 만에 라인강 위에 세운 카이사르의 다리, 18일 만에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카이사르의 전략은 의도한 대로 먹혀들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압도적인 역량과, 원한다면 언제든 라인강을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새겨 보였습니다. 덕분에 갈리아 국경은 확고히 지켜졌고, 이후 수세기 동안 게르만 부족들은 라인강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삼가게 됩니다.

이 다리는 또한 라인 계곡의 로마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훗날 카스트라 베테라(Castra Vetera, 크산텐),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 쾰른), 콘플루엔테스(Confluentes, 코블렌츠), 모군티아쿰(Moguntiacum, 마인츠)에 영구 다리들이 세워질 토대가 된 것입니다.

19세기 말 안데르나흐~노이비트 일대에서 실시된 고고학 발굴에서는 라인강 바닥에서 말뚝 유적으로 추정되는 잔해가 발견되었습니다. 20세기의 분석 결과 이 유물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쓰러진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카이사르의 다리 위치가 정확히 특정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한편 유비오스족의 운명은 달랐습니다. 기원전 39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는 이웃 부족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그들의 오랜 요청을 받아들여, 수년간 쌓아온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이들을 라인강 서쪽 강둑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유비오스는 이후에도 로마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켰고, 마침내 중세에 갈리아 땅에 새로운 왕국을 세운 프랑크족과 융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