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가톨릭교회의 성립
가톨릭교회는 이단 사상에 맞서 싸우고 기독교 교리를 확립한 교부들(敎父)의 활동을 통해 성립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 말기의 몇 세기 동안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내부적 위기로 무너져 가는 동안 가톨릭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며 기반을 다졌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반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끝났으며, 380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테살로니카 칙령에 서명하면서 기독교는 제국의 공식 종교(국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확립과 교리 체계의 형성은 당대의 정통 신학에 맞지 않는 모든 종교 교리, 즉 이단(異端)들과의 갈등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단들은 교회의 존립을 위협했기 때문에 교회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대표적인 이단으로는 영지주의(그노시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아리우스주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주의와의 갈등
아리우스주의는 4세기에 활동한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비롯된 교리로, 삼위일체 개념을 부정했습니다. 아리우스에게 아버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본질을 공유하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피조물로 보았으며, 신성을 지니긴 했지만 아버지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얻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처럼 일부 황제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고트족을 개종시킨 울필라스를 통해 이 교리는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되어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한편 가톨릭교회가 게르만 민족 사이에 뿌리내린 계기는 6세기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비스의 개종이었습니다.
교회 성립의 초기 단계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아타나시오, 성 예로니모, 대교황 그레고리오 등 여러 인물들의 공헌이 컸습니다. 이들은 교리 체계를 구축하고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비잔틴과의 분열, 그리고 이슬람의 등장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중 아스칼론 전투
게르만 민족의 복음화 이후, 기독교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바로 이슬람의 등장입니다. 이슬람은 '성전' 개념인 지하드(jihad)를 내걸고 눈부신 팽창을 시작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진 뒤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의 거의 전역을 정복했습니다. 유럽에서의 무슬림 팽창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저지되었고, 이로써 무슬림의 프랑크 왕국 진입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 외에도 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이의 분열이라는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라틴 교회와 비잔틴 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는 결국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대분열은 로마 중심의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교회의 최종적인 결별을 의미하며, 이로써 정교회(동방정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 이후, 가톨릭교회는 십자군 전쟁이라 불리는 군사 운동을 시작했습니다(르고프(Jacques Le Goff)에 따르면 '십자군'이라는 명칭은 15세기에야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 목표는 무슬림의 지배에서 예루살렘, 성묘, 그리고 팔레스타인 내에서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장소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십자군 전쟁과 공동의 적 설정을 통해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폭증하던 폭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통로로 삼고자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의로운 전쟁(Just War) 개념이 발전했는데, 이는 이교도, 즉 무슬림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여덟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 함락 과정에서 드러난 극심한 폭력으로 특징지어지며, 이후 짧은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 기독교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은 1187년 무슬림에게 재탈환되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은 1204년 기독교도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사건으로 악명 높습니다.
마지막 십자군 원정들은 성 루이(루이 9세)가 이끌었지만 큰 실패로 끝났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독교 영토인 아크레와 티레는 1291년 무슬림에게 재탈환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종교재판(이단 심문)
12세기부터 이단 사상이 기독교 사회에서 새롭게 힘을 얻으면서 교회는 이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이단 운동의 특징은 대중적인 호소력이 매우 컸다는 점입니다. 이단이 모든 죄 중 가장 큰 죄로 간주되면서 성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이단 운동은 알비파(카타리파)와 발도파였습니다.
종교재판의 기능은 이단 운동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조사하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고문 사용을 허용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역사가들은 성종교재판소가 몇 명을 처형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1| LE GOFF, Jacques. 『유럽의 중세적 뿌리』. Petrópolis: Vozes, 2011,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