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혁명 총정리: 배경과 원인부터 나폴레옹의 등장까지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른바 '현대사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19세기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구분선을 긋는 과정에서, 정치적 급진화라는 특징을 지닌 이 사건에 근세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이라는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어느 정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배경

18세기까지 프랑스는 절대왕정 체제를 따르는 국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며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한 몸에 쥐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 보편적인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은 입헌 민주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왕의 '신하'였습니다.

절대왕정 체제 안에서 프랑스 인구는 세 개의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 제1신분: 고위 성직자(주교들)가 대표하는 신분으로, 성직자 계층 전체를 포함합니다.
  • 제2신분: 귀족, 즉 프랑스 귀족 계층이 대표하는 신분입니다. 귀족은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검의 귀족과 법률·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법복 귀족으로 나뉩니다.
  • 제3신분: 부르주아지가 대표했으며, 하급 성직자, 상인, 은행가, 기업인, 산시클로트(sans-culottes, '무반바지파'), 도시 노동자, 농민 등이 속해 전체 인구의 약 97%를 차지했습니다.

18세기 후반 들어 프랑스는 수많은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영국과 벌인 7년전쟁(1756~1763),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1776년~)에서 미국을 지원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했던 프랑스 절대왕정의 궁정은 국가 재정으로 유지되었는데, 국가 예산은 이미 체제 운영을 떠받치는 관료제에도 대량으로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가 직면한 두 가지 위기가 더해졌습니다.

1) 농촌 위기: 1770년대와 1780년대의 잦은 흉작으로 물가가 62%나 폭등하며 농촌 경제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2) 재정 위기: 경제 근대화의 지연, 특히 산업 부문에 대한 투자 부족으로 공공부채가 누적되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계몽사상과 자유·평등을 알리는 팸플릿의 영향을 받은 제3신분의 많은 사람들이야말로 이 위기의 최대 피해자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1780년대 말, 부르주아지, 도시 노동자, 농민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위기에 대해 국왕과 궁정이 책임 있는 답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더 폭넓은 권리와 프랑스 정치 구조 안에서 더 큰 대표성을 요구했습니다.

1788년 7월, 삼부회 소집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사안을 심의하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이 소집 결정과 함께, 국왕을 지지하던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이해관계와 제3신분의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이 한층 격화되었습니다.

루이 16세는 1789년 5월 5일 삼부회를 열어 표결로 국가의 진로를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표결 방식은 '신분별 표결'이었습니다. 따라서 결과는 언제나 2 대 1, 즉 제1·제2신분이 제3신분을 압도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제3신분을 이끌던 부르주아지는 6월 10일 국민의회의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즉, 프랑스의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그러나 국왕, 귀족, 고위 성직자는 이 제안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6월 17일, 부르주아지, 노동자 및 제3신분의 다른 구성원들은 제1·제2신분의 응답 여부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헌법 제정을 위한 회의라고 선언했습니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민중 봉기가, 지방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단계

1. 국민제헌의회 시기

1789년 7월 14일,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바스티유는 구체제(Ancien Régime)의 상징이었던 감옥이었습니다. 이어 8월 4일, 국민의회는 귀족의 조세 면제 특권과 경작지 독점 등 각종 특권을 폐지하는 일련의 법령을 통과시켰습니다.

의회는 또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선포하여, 프랑스 국민이 더 이상 국왕의 신하가 아니라 '시민'의 지위를 가진다고 밝혔습니다. 1791년 9월에는 새로운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어 모든 이에게 시민권을 보장했고, 루이 16세는 그 기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담겼습니다.

  • 법 앞에서의 평등
  • 일정 세금 납부자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제한선거(납세자 선거)
  • 교회 재산(성직자 토지)의 몰수
  • 십일조의 폐지
  • 성직자 문관헌장(성직자에 대한 국가 통제) 등

이 무렵부터 혁명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 형태인 입헌군주제를 시도했으며, 이 체제는 1791년부터 1792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2. 국민공회 시기

혁명 내 가장 급진적인 세력인 자코뱅파는 제헌의회 시절 본회의장 좌측에 앉아 우측의 온건파 지롱드파와 대립했던 세력으로, 혁명의 확대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귀족과 군주에 결탁한 고위 부르주아지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하여 군주제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혁명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혁명이 나아가는 방향에서 오는 위협을 감지한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군주국의 지원을 받아 반혁명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1792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국왕의 계획을 알게 된 후 튈르리 궁을 습격해 국왕과 그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1793년,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로 처형되었고, 입헌군주제는 같은 해 막을 내렸습니다.

입헌군주제의 종식과 함께 제헌의회는 해산되었고,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국민공회 시기는 자코뱅 급진주의가 혁명을 주도한 시기로, 특히 단두대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된 데서 이름 붙여진 '공포정치'의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생주스트, 당통 등이 주요 자코뱅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혁명이 자국 영토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이 두 군주국과의 대결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군이 탄생했습니다. 즉, 용병이나 귀족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의 국민으로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된, 역사상 처음의 군대였습니다.

3. 총재정부 시기

1795년, 부르주아지는 권력을 되찾았고, 새 헌법을 통해 혁명의 새로운 국면인 총재정부를 설치했습니다. 총재정부는 의원들이 임명한 다섯 명의 총재로 구성된 기구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부터 프랑스 전역에서 사회 위기가 심각하게 확산되었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코뱅식 급진화가 되돌아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혁명군에서 가장 젊고 두각을 나타낸 장군 중 한 명으로, 프랑스 정치 상황에 질서를 가져올 인물로 부르주아지에게 기대를 받았습니다. 1799년,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총재정부에 맞서는 음모가 진행 중인 정치적 상황과 마주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혁명력 18 브뤼메르)를 통해 처음에는 독재자로 등장했고, 이후 프랑스 황제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는 1799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되며 유럽 대륙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동시에 민족주의 이념을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산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