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정치 제도는 교육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7세기경 신화 속 입법자 리쿠르고스(Λυκοῦργος)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다만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기원전 9~8세기로 소급하여 설명한다. 스파르타 왕가의 아들이었던 리쿠르고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피티아(여사제)를 참배하고, 미래의 스파르타 헌법인 '대(大) 레트라'(μεγάλη ρήτρα / megálê rhếtra)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이 헌법은 메시니아와의 긴 전쟁 이후, 귀족층과 도시 전체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마련되었다. 도시가 존속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에우노미아(εὐνομία)가 제정되었고, 이것이 불만과 특권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의 에우노미아는 엄격한 규율과 동의어였다. 왕권, 귀족, 평민 등 도시를 이루는 모든 계층이 희생을 치러야 했다.
리쿠르고스의 체제는 네 가지 정체(政體)의 요소를 하나로 결합한 혼합정이었다.
- 양두정(兩頭政): 두 명의 왕의 존재
- 과두정: 게로우시아(장로회)
- 참주정적 요소: 에포로스(감독관)
- 민주정: 시민 집회(에클레시아)
완전한 에우노미아
기원전 7세기의 위기는 기병이나 소수의 전차 병사로 구성된 구식 전사 계급을 대체하는 호플리테스(중장보병) 군대를 창설하는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토지 귀족을 평민 대중에 흡수하여 이러한 시민 계급을 만든 것이 바로 에우노미아(εὖ '좋은' + νόμος '관습, 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 흡수는 완전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매우 철저하게 추진되었다.
-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완전히 포기했다. 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시민 단체는 약 7,000~8,000명의 호모이오이(Homoioi, '동류자', 즉 평등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 토지 귀족들은 토지를 공유하기 위해 내놓았다. 각자는 양도 불가능한 동일한 분배지인 클레로스(κλῆρος, '분배지, 상속 재산')를 받았다. 이는 판매나 담보 제공이 금지되었고, 세습되지 않았으며, 국가 노예인 헤일로타이가 경작했다. 생산물은 현물로 소유자에게 돌아가 가족을 부양했지만,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상업 활동도 금지되었다. 그 결과 모든 시민은 오직 하나의 시민 활동, 즉 전쟁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다.
- 교육은 모든 이에게 동일했으며, 오직 전쟁만을 지향했다.
- 정치적 권리도 평등하여, 모든 시민이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집회
집회는 동류자들의 모임으로, 정해진 날짜에 소집되었다.
게로우시아가 작성한 안건이 집회에 제출되며, 집회는 이를 논의하지 않고(어떤 시민도 발언하지 않음) 에포로스가 제안한 수정안을 승인하거나 거부한다. 결정은 기본적으로 환호의 크기로, 드물게는 표결자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표결 결과는 게로우시아를 구속하지 않았으며, 게로우시아는 국민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여길 수 있었다.
집회는 또한 에포로스와 게론트(장로)를 선출했는데, 그 절차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린아이 같은 것이었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환호의 강도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실제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모든 스파르타인이 법률이나 수정안을 제안하기 위해 발언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집회가 단순히 에포로스와 게론트 선출에만 머물렀는지조차 불명확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집회의 권력은 너무나 미약해서, 그는 스파르타 정체를 설명할 때 이를 민주적 요소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두 왕
리쿠르고스 개혁 이후 기원전 7세기부터 스파르타에는 두 명의 왕(아르카게타이, arkhagétai, '지휘'를 뜻하는 archê에서 유래)이 존재했다. 한 명은 아기아다이(Agiádai) 가문, 다른 한 명은 에우리폰티다이(Eurypontídai) 가문 출신으로, 전설에 따르면 두 가문은 헤라클레스의 쌍둥이 후손에게서 비롯되었다. 두 가문 사이의 통혼은 금지되었고, 왕들의 무덤 역시 서로 다른 곳에 마련되었다. 두 왕은 대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왕권은 '가장 왕다운 권력을 지닌 자의 최근친(近親) 중 가장 가까운 후손'에게 전해진다(Pierre Carlier, 『La Royauté en Grèce avant Alexandre』, AECR, 1984). 즉, 아들이 형제보다 우선하는 장자 상속이지만, 아버지가 이미 왕위에 있는 동안 태어난 아들이 그렇지 못한 형제보다 더 우선했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인들은 이 상속 규칙을 꽤 관대하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군사적·종교적 성격을 띠었다. 초기에는 왕들이 원하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고, 왕권은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506년, 이른바 '엘레우시스의 분열' 사건 이후 왕들은 각자 단독으로 원정을 떠났다. 기원전 5세기에는 더 나아가 집회가 전쟁 개시를 표결하고, 에포로스가 동원을 결정했다. 어느 경우든 원정에 나선 왕은 총사령관(ἡγεμών / hêgemốn)이었다. 그는 다른 장군들보다 상위에 서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었으며, 100명으로 구성된 명예 호위대 히페이스(Ἱππεῖς / Hippeís)의 보호를 받으며 우익의 선두에서 직접 싸웠다.
게로우시아
게로우시아(γερουσία / gerousia)는 60세 이상 남성 28인과 두 왕으로 구성된 회의체로, 지원자 중에서 집회의 만장일치(환호)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되었다. 군사적 덕목을 기준으로 뽑힌 게론트 대부분은 스파르타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으나, 부나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후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발 기준은 게로우시아를 보수주의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게로우시아는 막대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했다. 법률을 작성하고 입법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으며, 집회의 표결에 대해 사실상의 거부권을 지녔다. 국내 정치의 모든 사안을 관리했고, 왕을 재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어떤 기관에도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 기원전 3세기까지 게로우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게로우시아는 동시에 최고 법원이기도 했다. 중대 범죄를 심판하고 사형 및 시민권 박탈을 선고할 권한을 가졌다.
다섯 명의 에포로스
에포로스(ἔφοροι / éphoroi)는 왕들에 맞서는 진정한 견제 세력이 된 감독 기구였다. 리쿠르고스 개혁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이 직제는 집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연임이 금지되었다.
이름이 시사하듯(ὁράω / oráô, '감시하다'에서 유래) 에포로스는 왕들을 감시하고, 도시의 주민들을 통제하며, 특히 전통의 준수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벌금과 징역형(왕에게도 적용 가능)을 부과하고 처형을 명령할 수 있었다. 실제로 크립티아(kryptia) 기간 동안처럼 헤일로타이를 재판 없이 처형하기도 했다. 아울러 외교를 담당하고, 자신들이 주재하는 집회의 결정을 집행했으며, 군대 동원을 명령하고 긴급 상황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이들 중 한 명(선정 방식은 불명)은 해당 연도와 공식 문서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 때문에 '에포님(同名) 에포로스'라 불렸다. 비교적 서민 출신에서 선발된 에포로스는 스파르타 사회의 평등주의를 상징하는 요소였다.
에포로스의 권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참주에 필적하는 자'(ἰσοτύραννος / isotúrannos)라고 묘사할 정도로 막강했다. 실제로 그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키케로는 『국가론』에서 이들을 로마의 호민관에 비유했다. 매달 왕들은 법률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고, 에포로스는 왕정을 유지하겠다고 맹세하는 상호 견제 관계가 성립했다. 그러나 에포로스의 권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연임이 불가능했고, 임기 종료 후 후임자의 발의로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었으며, 심각한 경우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