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군단의 최고 사령관(제너랄리시모)으로, 443년에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코메스 에트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티아에(comes et magister utriusque militiae, 양군 총사령관)'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5세기 야만족의 위협 속에서 로마를 지켜낸 공로로 '로마 최후의 인물(the last of the Romans)'이라 불렸다. 그가 활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롤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출생과 젊은 시절
아이티우스는 4세기 말 모이시아(마케도니아 지역)의 도로스톨루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가우덴티우스는 로마 제국에 복무하던 야만족 출신 군인으로, 기병대 총사령관(magister militum)을 거쳐 아프리카 백작(count of Africa)에 올랐다.
궁정 근위대에서 청년기를 보낸 아이티우스는 인질로서 먼저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1세의 궁정에 보내졌고, 이후 훈족의 왕 루아(Ruga)의 궁정에서 생활하며 젊은 시절의 훈족 왕자 아틸라와 친분을 맺었다. 훈족은 훗날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적이자 때로는 동맹이 되었다.
정치적 부상
귀국 후 그는 온전한 예우를 받았으며, 훈족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동안에는 이들을 용병으로 활용해 로마 갈리아를 위협하는 게르만족에 대항했다. 동시에 그는 로마에서 승리한 '반야만족' 파벌의 지지를 얻는 데에도 능숙했는데, 바로 이 파벌이 반달족 혼혈 장군 스틸리코의 실각을 이끌었던 세력이었다.
426년 그는 갈리아 프라이토리움 총독(praefectus praetorio per Gallias)이 되었다. 이후 그는 라인강 너머로 동부 프랑크족을 격퇴하고, 아르모리카의 바가우다이(bagaudae) 반란군을 진압했으며, 메로베우스조 살리아 프랑크족의 왕 클로디오(Clodion le Chevelu)를 헬레스메스(Hélesmes)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클로디오는 428년 아이티우스와 조약(fœdus)을 체결하여 로마를 위해 싸우는 '동맹민(federates)'이 되었고, 제국 내 투르네(Tournai)의 제국 세금 징수소 인근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428년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 황태후에 의해 갈리아 총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Gallias)으로 임명되었고, 429년에는 펠릭스(Felix)와 함께 제국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432년에는 처음으로 집정관(consul)에 임명되었다.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총애를 받던 원로원 의원 보니파키우스(Boniface)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아이티우스는 음모에 휘말렸고, 이 과정은 결국 반달족의 아프리카 침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433년부터 아이티우스는 제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그는 갈리아에 침입한 부르군트족의 왕 군디카리우스(Gondicaire)를 격파하고, 그들이 알프스산맥과 쥐라산맥 사이의 사파우디아(Sapaudia, 훗날 사보아 지방)에 정착하도록 강요하자는 표현보다는 협상을 통해 자리잡게 했다. 또한 프랑크족과 서고트족과도 여러 차례 교전했다.
435년 갈라 플라키디아는 그에게 파트리키우스(귀족) 칭호를 수여했고, 437년 두 번째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루아르 강 유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왕 고아르(Goar)에게 아르모리카인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러한 정책은 중세 초기 프랑스 영토의 일부 특징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446년에는 세 번째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447년경에는 프랑크족의 지도자 클로디오에게 동맹민 지위와 함께 제국 내 투르네 주변의 자치 영토를 허락했으며, 클로디오와 그의 후손들(메로베우스, 힐데리히 1세, 클로비스)은 다른 야만족으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카탈라우눔 평야 전투
아이티우스의 명성은 무엇보다 역사학에서 '카탈라우눔 평야 전투(battle of the Catalaunian Fields)'라고 불리는 대승 덕분이다.
451년 아틸라가 갈리아를 침공하자, 아이티우스는 부르군트족, 색슨족, 알란족, 프랑크족, 서고트족을 하나로 규합했다. 그는 서고트 왕 테오도리히 1세(Theodoric I)와 함께 로마-야만 연합군을 지휘하여 트루아(Troyes) 근처의 캠푸스 마우리아쿠스(campus Mauriacus)라 불리는 곳에서 훈족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갈리아 침공을 종식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비극적 최후
그러나 승리의 영광을 누리던 아이티우스는 결국 자신의 성공이 낳은 로마 내 질투와,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황실의 두려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454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명령에 의해 그는 칼에 찔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