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즈 공작 앙리 1세: '발라프레'라 불린 가톨릭 성맹의 지도자와 비극적 최후

프랑스 종교전쟁의 중심 인물

앙리 1세 드 기즈(Henri Ier de Guise), 통칭 '발라프레(le Balafré)'는 1550년 12월 31일에 태어나 1588년 12월 23일 블루아 성에서 암살된 인물로, 프랑스 종교전쟁기 초강경 가톨릭 진영의 지도자였다. 그는 조빌 공(Prince de Joinville)으로 태어나 1563년 기즈 공작에 올랐으며, 프랑스 왕국 귀족원 의원(Pair de France), 외 백작, 프랑스 대궁내관(Grand Maître de France)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년기와 군사 경력의 시작

앙리는 1563년 위그노 출신 자객 폴트로 드 메레에게 암살된 제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기즈와 안 데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숙부인 로렌 추기경 샤를의 후견 아래에서 교육받았다. 추기경은 조카의 군사적 역량을 키우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도록 권유했고, 앙리는 1565년 헝가리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다.

프랑스로 돌아온 앙리는 성인이 된 기즈 공작으로서 가문의 수장이 되어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맞서는 가톨릭 반대파를 이끌었다. 그는 앙주 공작(훗날 앙리 3세)과 함께 제2차·제3차 종교전쟁에 적극 참전했으며, 1569년 자르낙 전투(3월 13일)와 몽콩투르 전투(10월 3일)에서 두각을 나타내 명성을 얻었다. 다만 그 명성이 앙주 공작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왕실과의 혼담 결렬, 그리고 결혼

스무 살에 이미 큰 야심을 품고 있던 기즈 공작은 프랑스 왕녀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문과 왕조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이 혼사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이후 앙리는 1570년 10월 4일 느베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딸이자 외 백작, 샤토르노 여공작인 카트린 드 클레브와 결혼했다.

콜리니 암살 의혹과 생바르텔레미 학살

1572년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도자였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 암살의 배후로 기즈 공작이 지목되기도 했다. 9년 전 아버지 프랑수아를 암살한 위그노 폴트로 드 메레에 대한 복수가 동기였다는 것이다. 기즈 공작은 끝까지 자신이 자객에게 무기를 쥐여주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콜리니는 제1차 종교전쟁 당시 오를레앙을 포위하던 가톨릭군 지휘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환영한 바 있었다.

젊은 공작이 이 가문의 원수 갚기에 가담했다면, 기즈 가문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숙부들—오말 공작과 로렌 추기경—과 공모했거나 그들의 그늘에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1572년 8월 24일 생바르텔레미의 밤, 앙리는 주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처단하는 집단의 선두에 섰다. 그는 창문 너머로,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던 콜리니 제독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지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기즈 공작은 제독의 시신을 발로 찼다고 한다.

이후 앙리는 숙부 오말 공작과 함께, 남안에 숙소를 두고 파리의 무방비 문을 통해 탈출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의 뒤를 쫓았다. 따라서 학살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는 그가 시내에 없었으며, 다음 날에야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위그노의 강력한 지도자이자 왕살해범인 가브리엘 1세 드 몽고메리 백작을 붙잡는 데 실패했다.

'발라프레'라는 별명과 가톨릭 성맹

이후에도 기즈 공작은 비타협적 가톨릭주의의 기둥 역할을 계속했다. 1575년 10월 10일 도르망 전투에서 얼굴에 입은 상처 때문에 아버지처럼 '발라프레(흉터 난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내와 뜻을 함께하여 1575년경 노르망디 북부에 외 성(Château d'Eu) 건설을 명하기도 했다. 볼리외 평화 조약 이후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서는 가톨릭 성맹을 지원했고, 곧 그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자격으로 1582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조빌 조약을 체결하여 성맹에 대한 재정 지원을 받아냈다.

그는 또한 1585년 7월 7일 뇌무르 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이 조약으로 앙리 3세는 화평 칙령을 철회하고 프로테스탄트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군사적 승리와 왕권과의 충돌

제8차 종교전쟁에서 가톨릭군을 이끈 기즈 공작은 1587년 10월 26일 비모리 전투, 이어 11월 24일 오노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연달아 격파했다.

1588년 5월 9일, 국왕의 정식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5월 12일 '바리케이드의 날' 사건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 그는 유럽 내 프로테스탄트의 최대 적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매수되었다는 의혹도 받았는데,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29일 무적함대를 영국으로 파견하며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결정적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협이 겹치면서 앙리 3세는 1588년 7월 15일 연합 칙령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기즈 공작은 왕국군 총사령관(중장)이 되었다.

블루아 성에서의 최후

1588년 10월 2일, 삼부회가 블루아 성에서 개회되었다. 같은 해 8월 무적함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국왕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나, 성맹파가 다수를 차지한 가운데 공작은 국왕을 축출하기 위한 새로운 대결 국면에 돌입했다. 1588년 12월 17일, 삼부회에서 성직자 대표로 참석한 기즈 가문의 루이 추기경은 형 기즈 공작의 건배를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국왕의 건강을 위해 마시겠습니다."

결국 1588년 12월 23일, 앙리 드 기즈는 앙리 3세의 명령으로 국왕의 침소에서 '마흔다섯(Les Quarante-Cinq)'이라 불리는 국왕 직속 호위대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공작의 시신에서는 그의 필체로 쓰인 다음과 같은 쪽지가 발견되었다. "프랑스에서 전쟁을 유지하려면 매달 70만 리브르가 필요하다." 그의 시신은 성의 한 방에서 불태워졌고, 재는 루아르 강에 뿌려졌다. 같은 날 아들 샤를과 동생 루이 추기경이 체포되었으며, 추기경은 다음 날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죽음이 남긴 유산

이 암살 사건을 소재로 피에르 마티외는 비극 『라 기지아드(La Guisiade)』(1589)를 집필했다. 확실한 출처는 없지만, 앙리 3세에게 유명한 한 마디가 끊임없이 귀속되고 있다. 적의 시신이 발치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본 국왕은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진다. "저자는 죽어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위대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