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앙리 4세의 통치와 죽음: 백성 곁에 선 부르봉 왕조의 첫 군주

앙리 4세의 통치와 죽음: 백성 곁에 선 부르봉 왕조의 첫 군주

정치가로서의 앙리 4세

가볍고 경박하며 변덕스러운 외면 아래, 인간미 넘치는 성품과 풍부한 기사도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일대기 속에서 앙리 4세는 한 명의 뛰어난 정치가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0년간 무정부 상태에 놓였던 광대한 나라에서 그는 즉시 국가보다 개인적 이익을 앞세우는 대귀족들을 누르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옛 전우였던 비롱(Biron)은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을 고집하다 끝내 1602년 처형당했습니다. 반면 국왕은 국가의 하급 관료들에게 '폴레트 칙령(édit de la paulette)'을 허락함으로써 그들을 포섭했습니다. 이 칙령은 관직 매매와 관직 세습의 원칙을 규정한 것으로, 왕권과 관료층의 이해를 묶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대외 확장과 동맹의 외교

대외적으로는 1601년 리옹 조약을 통해 소네 강과 론 강 사이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브레스(Bresse), 뷔제(Bugey), 발로메(Valromey), 제 지방(Pays de Gex)을 획득하면서 백합 문장이 제네바 성문 앞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소공국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토스카나는 훗날 국왕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왕조의 대를 잇게 할 마리 드 메디시스 공주를 보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만큼이나 눌러야 할 적수였기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세력과도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훗날 리슐리에 추기경이 펼칠 정책의 씨앗을 엿볼 수 있습니다. 1610년 국왕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오늘날 벨기에) 방면으로 원정을 계획했다는 것은 젊고 매력적인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가 남편 콩데 공작에게 이끌려 브뤼셀로 간 일에 대한 감정적 우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루이 11세와 프랑수아 1세 같은 근세 선왕들의 위업을 이어받은 앙리 4세는 다시금 17세기 초 후계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샹플랭이 1608년 퀘벡을 건설하면서 프랑스는 세계적 차원의 위상을 갖추게 됩니다.

프랑스가 얻은 '마젤란'

바로 이 통치기에 왕국이 자신만의 '마젤란'을 얻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입니다. 브르타뉴 출신 피에르 올리비에 말레르브(Pierre Olivier Malherbe)는 남미 대륙을 돌아 필리핀과 동남아시아까지 도달했고, 무굴 제국 황제와 페르시아 샤의 예우를 받은 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1609년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해외에서 확인한 금·은 광산의 개발을 국왕에게 직접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라바야크의 단검, 그리고 남겨진 유산

1610년 5월 14일, 라바야크(Ravaillac)의 단검이 페로누리 거리(rue de la Ferronnerie)에서 '선왕 앙리'를 찌릅니다. 아마도 데페르논(d'Épernon)과 실의에 빠진 정부 베르뢰유 후작 부인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는 이 범죄 행위는 왕국의 정치 상황을 크게 바꾸지 못했습니다. 비록 루이 13세의 어린 시절에는 궁정 음모와 야심이 십여 년간 더 이어졌지만, 군주제의 운명도 왕국의 통일도 위협받지 않았습니다. 앙리 4세의 위업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은 단순함과 자애로움에 더해 공공의 이익을 걱정하는 것이 지배적 특징인 군주를 불공하게 덮친 것입니다. 전장에서 눈부신 흰 깃털 장식과 함께, 민중의 상상 속에는 '일요일마다 냄비에 닭고기'라는 유명한 공식이 남아 있습니다. "내 백성이 가난해지면, 누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인가? 누가 국가의 부담을 짊어질 것인가? 누가 세금을 바칠 것인가? 백성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다."라고 그는 귀족들에게 일깨워 주곤 했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위대한 군주

물론 부르봉 왕조의 첫 번째 국왕에게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부하 장수들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고, 사생활의 방종은 왕국에 큰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욕과 결점들, 즉 그가 완벽한 군주로 보이는 것을 막는 요소들은 그의 대중적 영광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오귀스탱 티에리(Augustin Thierry)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그의 고결한 덕성과 기이한 약점은 한꺼번에 사랑스럽고 위엄 있으며, 판단은 깊으면서 취향은 가볍고, 영혼의 위대함과 계산, 백성에 대한 연민과 혈통에 대한 긍지를 겸비한, 그리고 언제나 무엇보다도 훌륭한 애국자라는 유일무이한 군주상을 만들어냈다. 왕좌가 국민과 이토록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