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법(인디제나)의 탄생 배경
1830년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튀르크 섭정정권을 무력으로 격파하고 알제리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를 법적·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난 알제리인들, 특히 카빌리아(Kabylia) 지역 주민들은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러한 반감은 결국 1871년 엘 모크라니(El Mokrani) 봉기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 격렬한 봉기를 계기로 프랑스는 원주민들의 잠재적 반란 가능성을 의식하게 되었고, 인구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1881년 6월 28일

주요 인물
- 토마 로베르 뷔고(Thomas Robert Bugeaud)
- 쥘 페리(Jules Ferry)
절차 및 내용
1881년 6월 28일, 쥘 페리 정부 하의 프랑스는 특별한 신분 체계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알제리인들이 자신의 종교와 전통을 유지하며, 프랑스 민법과 양립할 수 없는 코란의 율법을 계속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프랑스는 원주민에게만 적용되는 범죄와 처벌을 규정한 일련의 포고령과 법률을 채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법적으로 엄밀한 의미의 '법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체제', 즉 '인디제나(indigénat, 원주민 체제)'였습니다.
모순과 차별의 시스템
이 체제는 탄생 초기부터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권력 남용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알제리가 프랑스 영토라면 무슬림들도 시민권을 가져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1870년 크레뮤(Crémieux) 포고령으로 알제리 유대인들은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받은 반면, 무슬림들은 시민권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두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이 시스템은 명백히 차별적이었습니다.
무슬림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할 길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코란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포기하고 프랑스 행정 당국의 귀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배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청하는 사람조차 소수였고, 실제로 시민권을 얻은 이는 더욱 드물었습니다.
삼권분립 원칙의 위배
또 다른 중대한 문제는 판사가 아닌 행정부가 직접 규칙을 집행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권력 분립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프랑스 헌법의 기본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이른바 이 '법전'은 예외적인 체제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의적인 처벌
게다가 이 체제는 알제리에서 7년마다 개정될 수 있었습니다. 처벌은 따라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남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처벌의 형태는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단순 벌금, 동산·부동산의 징발(압류), 그리고 구금(수감, 추방 또는 가택 연금)까지 다양했습니다.
이 체제는 나라를 평정하고 알제리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원주민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유지하고 어떠한 반란도 억누르기 위해 끊임없이 갱신되었습니다.
결과와 영향
알제리에서 먼저 시행된 인디제나 체제는 1887년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로 확대되었습니다. '잠정적'이었던 이 체제는 공식적으로 1946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현지 상황에 맞춰 조정되며 동화를 촉진해야 했던 이 '법전'은 정작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의 차이와 긴장만을 증폭시켰고, 결국 저항과 봉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926년 북아프리카의 별(Étoile Nord-Africaine) 협회가 창설되면서, 알제리인들 사이에는 정체성에 대한 각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