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헌 의회 시대의 개막: 바스티유 함락부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까지

제헌 의회 시대의 개막: 바스티유 함락부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까지

바스티유 함락, 혁명의 상징이 되다

1789년 7월 12일, 파리는 재무총감 네케르(Jacques Necker)의 해임 소식을 접했다. 만성적인 물가 폭등에 분노해 있던 시민들에게 수도 외곽에 대규모 왕실 군대가 집결해 있다는 소식은 불안을 한층 가중시켰다. 여기에 팔레 루아얄(Palais-Royal)에서 활동하던 웅변가들의 선동이 더해지면서—그래서 오를레앙 공작의 음모라는 소문까지 퍼졌는데—시민들은 '강도'와 '국민의 적'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찾아 무기고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이틀 후인 7월 14일, 천여 명의 파리 시민이 무기를 확보할 목적으로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다. 격렬한 공성전 끝에 이 오래된 국가 감옥은 반군의 손에 넘어갔다. 수감되어 있던 죄수 7명이 석방되었고, 바스티유 총독 드 로네이(Bernard-René de Launay)와 수비 병사들은 학살당했으며, 파리 상인 대표 자크 드 플르셀(Jacques de Flesselles) 역시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그 자체의 규모만큼이나 강력한 상징성을 지녔다. 왕정 전제주의를 물리친 '주권을 가진 국민'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바스티유 습격은 프랑스 혁명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바로 파리라는 도시와 그 시민, 시 정부(바이이 Jean Sylvain Bailly가 이끌었다), 그리고 국민위병(지휘관은 대중의 사랑을 받던 라파예트 후작 Marquis de La Fayette)이 정치의 중심에 등장하는 시대의 개막이었다.

삼색기의 탄생과 지방 자치 운동

7월 17일, 해임되었던 네케르가 소환된 뒤 루이 16세는 파리 시청(Hôtel de Ville)을 직접 방문했다. 거대한 군중의 환호 속에서 그는 시장 바이이의 손으로부터 수도의 상징인 청색과 적색 리본 장식(코카드)을 받았다. 여기에 왕실의 흰색이 더해지면서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한편 왕국 전역에서는 지방 자치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상공에는 새로운 위협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공포와 특권의 폐지

1789년 여름,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유랑민의 확산, 그리고 외부 세력이 부추긴 것으로 추정되는 불안감이 결합하면서 농촌 지역은 일종의 집단적 공포 상태, 즉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혔다. 농민들은 무장하고 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학살하고 봉건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들을 불태워 파괴했다. 이 반란의 발발은 역사에 '대공포(La Grande Peur)'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대공포는 국민 제헌 의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노아유 자작(Vicomte de Noailles)의 발의로 8월 4일 밤, 귀족들이 특권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듯 스스로 내려놓으면서 봉건 특권의 전면 폐지가 선언되었고, 루이 16세는 '프랑스 자유의 회복자'로 추대되었다. 평등화 과정에서 중요한 한 걸음이 내딛어진 것이다. 다만 8월 4일의 열정 속에서 채택된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정의하고 실행 가능한 제도로 만드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같은 달 26일, 같은 관용과 이상주의의 정신 아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편적 원리로 천명하며, 근대 입헌주의와 인권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