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혁명의 서막, 삼부회 개회(베르사유, 1789년 5월 5일)

프랑스 혁명의 서막, 삼부회 개회(베르사유, 1789년 5월 5일)

재정 위기 속에 열린 삼부회

국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삼부회(신분제 의회)는 처음부터 갈등의 지평 위에 놓였습니다. 네케르의 일관성 없는 연설, 제3신분에 대한 무의미한 형식적 번거로움, 신분별 표결이냐 머릿수 표결이냐를 둘러싼 궁정의 애매한 태도, 그리고 국민이 간절히 바라던 헌법 제정 문제에 대한 침묵까지 — 이 모든 것은 소속과 무관하게 모든 대표를 어려운 입장에 내몰았습니다.

한 대표가 적었듯이, 순식간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대표 자격 심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코뮌의 대표들', 즉 제3신분은 날이 갈수록 하위 성직자들은 물론 귀족 출신 대표들까지 합류하며 진영을 넓혀갔습니다.

국민의회 선포와 테니스 코트의 맹세

6월 17일, 제1·제2신분 강경파의 비타협적 태도에 맞선 제3신분은 혁명의 첫 번째 큰 전환점을 만들어냅니다. 시예스의 제안에 따라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포하고, "본회의의 동의 없이 징수되는 모든 세금은 불법이다"라고 결의한 것입니다. 주권 이양의 첫걸음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사흘 뒤, 날로 규모가 커지던 젊은 국민의회는 메뉴플레지르 관에서 회합하기로 했지만, 대표들은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멈춰야 했습니다. 왕권은 '공사 중'이라는 억지스러운 명분으로 불만을 표시한 셈입니다. 이 조치는 즉각 '소집된 국민'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이 의장의 인솔 아래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왕국의 헌법이 확립되어 굳건한 기반 위에 세워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고, 상황이 요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집회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왕의 양보와 제헌의회로의 전환

6월 23일, 세 신분의 대표들은 국왕의 연설을 듣기 위해 다시 소집되었지만, 이날 역시 좋은 결과로 끝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조언에 따른 국왕은 진행 중인 변화의 파장을 과소평가하는 듯했고, 어색하게 치러진 '왕실 회의'에서 수용할 준비가 된 개혁의 한계를 제시했으나 국민의회는 이를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국왕은 세 신분의 분리를 재확인하며 대표들에게 신분별로 나누어 심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3신분은 회의장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결국 국왕은 물러섰습니다. 스스로 모든 귀족과 성직자에게 6월 17일의 '이단자들' 곁으로 합류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바이의 말대로 이제 "가족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침내 7월 9일,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을 맡은 제헌의회로 거듭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