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파리 코뮌에 맞선 베르사유 정부: 티에르의 군대와 국민방위군

파리 코뮌의 활동 중 상당 부분은 티에르 정부의 군대, 이른바 '베르사유아(Versaillais)'가 주도한 공세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지원 아래 증강된 베르사유군

티에르가 독일과의 강화 협상을 담당하던 쥘 파브르(Jules Favre)와 주고받은 전보 서신에서 드러나듯, 티에르는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측은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적대 행위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를 바랐으며, 그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리의 무장 해제였다.

휴전 협정은 파리 지역에 프랑스군 4만 명만 주둔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신속하게 포로 수용소의 병사 거의 6만 명을 석방하여 티에르가 보유한 1만 2천 명의 병력에 합류시켰다. 4월 1일 티에르는 국민의회에서 "프랑스가 보유했던 가장 훌륭한 군대 중 하나"를 편성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이후 '피의 일주일'이 시작될 무렵 베르사유군의 규모는 13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7년 복무를 마친 직업군인으로 대부분 농촌 출신이었다. 징병 검사 위원회는 도시 청년들을 '신체 결핍'을 이유로 대거 탈락시켰는데, 이는 1841년 아동노동법에도 불구하고 당시 산업 현장이 어린 노동자들에게 강요한 극악한 노동 조건 때문이었다. 이 군대의 지휘관은 세당(Sedan) 전투에서 패배한 장본인인 마크마옹(Mac-Mahon) 원수였다.

파리 북부와 동부 교외를 장악한 독일군은 파리를 우회하려는 베르사유군의 통행을 묵인했다. 나아가 티에르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북부 철도(Chemin de fer du Nord)를 점거하고, 마른강에서 몽트뢰유까지 병력 봉쇄선을 구축했으며, 코뮌군이 장악 중이던 빈센느 요새와 그 앞 관문 인근에 포 80문과 병력 5천 명을 집결시켜 수도의 동쪽 출구를 완전히 차단했다.

코뮌의 유일한 무기, 국민방위군

잘 훈련되고 잘 무장한 이 대군에 맞서 코뮌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오직 국민방위군(National Guard)뿐이었다. 왕정복고 시대 이래 정치적 권리를 가진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국민방위군에 속했으며, 무기는 국가가 지급했지만 군복 등 복장은 방위군 자체의 부담이었다. 파리에서는 구(區) 단위로 모집이 이루어졌고, 코뮌 관할 구역 내 복무는 무급이었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 복무하면 급여를 받았다.

대대 수의 폭발적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참여

제2제국 시기에는 25세에서 50세 사이의 기혼 남성 전원이 징집 대상이었다. 1870년 8월 12일 정부는 60개 대대를 재편성했는데, 그중 4분의 3 이상이 파리의 부르주아 지역인 서부와 도심에서 충원되었다. 그러나 9월 초 국방정부가 60개 대대를 추가로 창설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9월 말에는 대대 수가 254개에 이르렀고, 새로 창설된 대대의 4분의 3은 파리 동부의 노동자 계급 지역(10구, 11구, 18구, 19구, 20구)에서 모집되었다.

여기에는 독일군의 포위망 속에서 되살아난 파리 시민의 애국심이 작용했지만, 봉쇄로 인한 실업 속에서 급여가 노동자 가정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는 점도 컸다. 4월 5일 코뮌은 17세에서 19세 사이 청년의 자원 입대와 더불어 19세에서 40세 사이 미혼·기혼 남성의 의무 복무를 골자로 하는 동원령을 반포했다.

실질 전력과 병력 감소의 원인

그러나 이들은 실질적인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고, 공화주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면서도 규율에 순응하기를 꺼렸다. 여기에 몇몇 예외(돔브로프스키, 로셀 등)를 제외하면 지휘관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까지 겹쳤다. 장교들이 군 지휘 역량보다는 신념을 기준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론상 코뮌은 5월 6일자 『코뮌 관보』에 게재된 수치대로 약 19만 4천 명의 병력과 부사관·장교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 인원은 훨씬 적었다. 추산치는 카미유 펠르탕(Camille Pelletan)의 1만 명부터 4월 5일 육군대표 클뤼제레(Cluseret)의 4만 1,500명까지 천차만별이다. 4월 초에는 2만 5천~3만 명, 5월 중순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급격한 병력 유출은 급여만을 노리고 등록한 다수가 실제 전투에서 방관자로 남았다는 사실과, 베르사유군에 대한 군사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인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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