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없는 나라에 도착한 국빈
호치민은 1946년 6월 12일,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 도착했고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이 방문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주석이 프랑스 땅에 내리던 그 시점, 프랑스는 아직 인도차이나 정책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드골 장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뒤 1월에 그 뒤를 이었던 펠릭스 구앵(Félix Gouin) 내각은 바로 직전에 무너진 참이었다. 조르주 비도(Georges Bidault)가 새롭게 구성하는 정부가 출범하기를 기다린 끝에야, 6월 22일에 비로소 호치민이 수도에서 공식적으로 접견될 수 있었다.
비아리츠에서 보낸 열흘
나는 열흘 동안 비아리츠에서 프랑스의 손님을 관광 산책과 참치 낚시로 시간을 보내게 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한편 코친차이나에서는 동맹국의 지원과 르클레르가 신속히 전개한 작전 덕분에, 그리고 하노이의 모험과 체제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던 베트남인들의 협조 덕분에, 프랑스는 몇몇 확고한 거점을 확보하며 많은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환상은 일부 완고파의 부추김을 받은 다르앙리외(D'Argenlieu) 제독으로 하여금 코친차이나만을 위한 별도의 해법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코친차이나는 안남이나 통킹과 달리 프랑스의 직할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6월 1일, 이 지역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호치민이 프랑스행 비행기 안에서 접하게 된 이 일방적인 결정은, 베트남 대표단이 퐁텐블로 회의에 임하는 자세에 불신을 한층 짙게 새겨 넣었다. 이미 4월에 달랏에서 열린 사전 준비회의에서도 최종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양 진영을 사로잡은 정치적 격정
양 진영 모두에서 정치적 격정이 개입하고 있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공산당이 베트남의 요구를 격렬하게 지지한 반면, 우파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협상 대표단에게 강경 노선을 부추기며 배신을 외쳤다. 그 결과 긴장은 날마다 고조되었고, 회의론 역시 날마다 양 진영을 함께 잠식해 갔다. '프랑스는 3월 6일 협정을 무력화하려 할 뿐'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베트남인들의 평소 불심을 증폭시키는 데는, 그 어떤 특별한 계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결렬을 향한 근본적 쟁점들
그러나 이런 형식이나 분위기의 문제만으로 회의가 결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점의 차이 때문에 해결이 거의 불가능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 삼기(三圻), 즉 통킹·안남·코친차이나의 통합 문제
- 관세 문제
- 외교 대표권 문제
- 프랑스어의 위상 문제
실제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독립 국가로서의 모든 권한을 얻고자 했다. 반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연방과 프랑스 연합(Union française) 안에 위치한 자치 국가로서의 권한만을 인정하려 했다. 호치민은 프랑스 연합 가입 자체는 수용했지만, 베트남을 분열시키는 연방 체제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