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에 내린 낙하산, '캐스터' 작전
1953년 11월 20일, 프랑스군은 베트남 북서부의 오래된 비행장 상공에 제1·제2·제6 식민지 낙하산병 대대를 투하하는 '캐스터(Castor)' 작전을 개시했다. 75mm 무반동포로 무장한 두 개 대대와 81mm 박격포 1개 소대가 이들을 증원했으며, 공수부대는 훈련 중이던 베트민(Viet Minh) 2개 중대를 공격해 곧 계곡 일대를 장악했다. 최초의 공수 선발대에는 공병 1개 중대와 의무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병력들은 하노이 인근 박마이(Bạch Mai)와 자람(Gia Lâm) 기지에서 발진한 C-47 수송기 64대에 실려 투입되었다.
계곡을 손에 넣은 프랑스군은 11월 24일부터 복구를 마친 활주로로 항공기를 직접 착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디엔비엔푸는 공중 보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고립 거점으로 변모해 갔다.
1만 명이 넘는 수비군과 막대한 화력
이듬해 3월 기준 디엔비엔푸 주둔군은 총 10,133명에 달했다. 외인부대 4개 대대, 모로코 티라이유르(식민지 보병) 제3대대, 베트남 보병 제2대대, 타이족 보병 제3대대로 구성된 이 부대는 155mm 야포 4문과 105mm 야포 24문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지상 지원용과, 개입 가능성이 있던 중국군 항공기에 대비한 20mm·40mm 대공포가 함께 배치되었다.
트럭·지프·구급차 등 차량 127대로 이루어진 수송 중대, 공병 대대 1개, 야전병원 2곳, 보급부대 3개도 주둔하고 있었다. 항공 전력으로는 정찰기와 함께 전폭기 커티스 SB2C 헬다이버 5대, 보우트 F4U 코르세르, C-47 수송기 4대, 그리고 부상자 후송용 시코르스키 S-51 헬리콥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M24 채피 경전차 10대를 분해해 공중으로 수송한 것은 군사 역사상 손꼽히는 공중 보급 사례로 꼽힌다. 전차 한 대를 옮기는 데 C-47 수송기 5대와 브리스톨 프레이터 수송기 2대가 필요했다.
결정되지 않은 목적, 미완성의 방어선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곳을 완전한 방어진지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기동 순찰 기지로 운영할 것인지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결과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광범위한 철조망이 설치되었지만 은폐호와 참호는 턱엔이 부족했고, 순찰대는 곧 방어선 밖으로 깊이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 응우옌 지앱(Võ Nguyên Giáp) 장군은 이 도전에 정면으로 응했다. 그의 병력은 보병·포병·대공 화력으로 이루어진 조밀한 포위선을 형성해 수비군을 서서히 질식시켜 갔다.
지앱의 대규모 동원: 7만 대군과 6만 인부
1953년 12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지앱은 제304·308·312·316 보병사단과 제351 포병사단, 공병 연대 1개를 디엔비엔푸 전선에 집결시켰다. 총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여기에 남녀 6만 명의 지원 인부가 도로 건설과 보급품·탄약 수송에 동원되어 전선을 뒷받침했다.
베트민이 배치한 화력 또한 막강했다. 105mm·75mm 야포 144문, 120mm 박격포 48문, 75mm 무반동포 30문, 그리고 이후에는 카츄샤 6연장 로켓 발사기 12문까지 갖추었다. 이 화기들은 견고한 진지에 매설되고 좁은 포문만 내어 놓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대포병 사격이 닿기 거의 불가능한 표적이 되었다. 언덕에는 12.7mm에서 37mm에 이르는 대공포 180문 이상이 배치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루르 지역을 지켰던 방공망보다 더 촘촘한 대공 탄막을 형성했다.
개전,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함락
지앱은 8대 1의 병력 우세를 확보한 뒤 1954년 3월 13일을 총공격일(D-Day)로 정했다. 이날 베트민 포병이 디엔비엔푸 전역에 포문을 열었고, 다음 날에는 활주로 위의 C-47 2대와 전투기 1대가 파괴되었다.
오후 5시 15분, 베트민은 외인부대 제13반여단 제3대대가 방어하던 지원 거점 '베아트리스(Béatrice)'에 대한 강공을 개시했다. 밤 9시경에는 마지막 저항 거점 하나만 남았고, 자정을 넘기자 전장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베아트리스'는 함락되었고, 수비군은 75%의 손실을 입었다. 적진을 뚫고 빠져나온 병력은 겨우 200명이었다.
'베아트리스'의 함락은 56일간 이어질 디엔비엔푸 공방전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결국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종언을 알리는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