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배신자들의 시대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독일의 침공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세르비아 측에서는 그 원인을 크로아티아인들의 이탈에서 찾았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무엇보다 유고슬라비아군의 병력 집결 계획 자체가 잘못 세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를 바란 것은 크로아티아인만이 아니었다. 똑같은 소망을 품은 세르비아인들도 존재했다.
즈보르(ZBOR)에서 태어난 의용군단
'세르비아 의용군단'의 뿌리는 1935년 설립된 국가사회주의 성향의 단체, 즉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즈보르(ZBOR)'에 있다. 이 조직은 히틀러 독일로부터 후한 자금 지원을 받았다. 지도자는 디미트리예 요티치였다. 그는 1934년 알렉산드르 국왕이 암살될 때까지 왕정 정부의 장관으로 재직했으며, 국왕 암살 직후 즈보르를 창설했다.
조직
1941년 7월, 유고슬라비아는 점령지로 전락한 상태였고, 명목상으로는 네디치의 협력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 체트니크와 공산주의자들은 반란에 나섰는데,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봉기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세르비아인 동맹을 물색했고, 마침내 찾아내게 된다.
1941년 9월 16일, 요티치가 이끄는 즈보르 소속 234명이 독일 편에서 싸우기 위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조직했다. 지휘관으로 임명된 이는 당시 대령이던 콘스탄틴 '코스타' 무시츠키(Mušicki)로, 조국 유고슬라비아가 침공당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을 도왔던 인물이었다.
다음 날에는 각 중대가 120~150명으로 구성된 12개 중대 규모의 연대급 부대 창설이 결정되었다. 자원병 다수는 즈보르 출신이었지만, 그보다 많은 수는 이미 독립한 크로아티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대원들은 초기에 유고슬라비아군 군복을 입었고, 이후 이탈리아제 군복도 지급받았으며, 헬멧은 이탈리아제와 체코슬로바키아제를 사용했다. 부대 문장은 유고슬라비아 국기 색깔의 십자가 한가운데 성 게오르기(성 게오르기우스)를 새긴 것이었고, 표어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였다. 무장은 독일제·이탈리아제·유고슬라비아제 무기가 혼용되었다.
무장 투쟁
부대는 창설 첫날인 1941년 9월 17일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공산 게릴라와의 교전에서 두 명의 대원이 전사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 이 부대는 세르비아 국가방위대(네디치 정부에 독일이 허용한 군대) 및 체트니크 부대와 함께 '슈마디야 군단'을 구성해 독일 제113보병사단 산하에서 우지체(Užice) 일대 공산 반군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작전은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되었지만 반군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이어 독일군은 체트니크를 공격했지만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ža Mihailović)를 생포하는 데는 실패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무시츠키의 밀통으로 미리 소식을 접하고 탈출했으며, 무시츠키는 체포되어 준장 쿠키치(Kukić)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네디치의 개입으로 무시츠키는 다시 지휘관 자리에 복귀했다. 한편 부대는 1942년 초 약 3,700명 규모로 성장해 완편 4개 대대와 창설 중인 1개 대대로 편제되었다. 1942년 티토의 파르티잔과의 교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사실상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43년에는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양쪽과 동시에 싸웠다. 이 무렵 독일군은 체트니크의 핵심 인물 파블레 주리시치(Pavle Đurišić)를 생포했고, 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과 손잡았다. 그가 조직한 자원부대는 의용군단에 합류했고, 부대는 여단 규모로 확대되었다. 주리시치는 무시츠키 지휘 아래 부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 파르티잔 역시 강화되어 이제 정규군에 필적하는 조직력과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히틀러와 네디치의 합의로 의용군단 증강이 결정되었다. 최종적으로 부대는 5개 연대, 거의 9,900명 규모에 달했다. 1944년에도 파르티잔과 계속 교전했지만 전환이 기울면서 부대는 붕괴 조짐을 보였고, 상당수 대원들이 체트니크 진영으로 이탈했다.
파르티잔과 소련군의 남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진입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주목할 점은 1944년 9월 의용군단이 체트니크 지도자 미하일로비치를 파르티잔의 포위망에서 구출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9월 9일 의용군단과 합류한 체트니크 연합군은 파르티잔에게 참패했다. 그럼에도 잔존 병력은 독일군 지휘 아래 저항을 계속했다.
패배가 거듭되자 독일군은 의용군단을 무장친위대(Waffen-SS)에 통합시키고 병력 철수를 명령했다. 대원들은 슬로베니아로 옮겨졌다가 다시 더 북쪽으로 이동했다. 슬로베니아 국가사회주의자와 체트니크 등 다른 생존자들을 흡수한 의용군단은 다시 약 8,000명 규모를 회복했다. 슬로베니아에서 파르티잔과 교전해 처음에는 나름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 다른 적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동맹국' 크로아티아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규정된 의용군단 대원들은 크로아티아 측에 의해 수차례 처형당했다.
의용군단은 1944~45년 겨울 내내 SS 진영에 서 있었음에도, 절망에 가까운 집념으로 반파르티잔 전투에서 눈부신 성과를 냈다. 마지막 승리는 1945년 3월이었지만 이미 전세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다. 1945년 4월의 마지막 격전에서는 독일군, 슬로베니아 나치, 체트니크, 러시아 반공주의자들과 함께 티토 군대에 맞서 싸웠다. 3월 27일 무시츠키가 해임되고 다미야노비치(Damjanović) 장군이 부대의 마지막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비참한 최후
의용군단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 '유고슬라비아 국내군'에 합류했다. 1945년 4월 20일, 추축군은 리예카(Rijeka) 인근에서 제4파르티잔군단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사흘 뒤 거의 포위될 위기에 몰렸다. 의용군단 일부는 간신히 탈출해 류블랴나에 도착한 뒤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향했다. 나머지는 이탈리아로 후퇴했다. 이탈리아를 거친 병력 약 2,500~3,000명은 영국군에 인계되었다.
오스트리아로 향하던 병력 역시 영국군에 넘겨졌고, 며칠 뒤 영국군은 이들을 다시 파르티잔에게 넘겼다. 파르티잔은 이들을 학살했다. 의용군단 대원 최소 2,400명이 슬로베니아 나치 약 10,000명과 함께 살해당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항복한 이들은 독일 내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1947년에야 석방되었고, 이후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살아갔다. 그러나 무시츠키 장군은 영국군에 의해 티토에게 인도되어 1946년 반역죄와 전쟁범죄로 처형되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의 세르비아에도 이 부대를 지지하는 추종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글: 판텔리스 D. 카리카스(Pantelis D. Karikas)

지휘관 무시츠키.

의용군단 대원들과 미하일로비치 휘하의 체트니크 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