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산에서의 처참한 후퇴
11월 2일, 중공군의 매복을 간신히 빠져나온 미 제8기병연대의 다른 부대들은 운산에서 좁고 구불구불한 산악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본래 보행자와 나귀가 다니던 험로를 차량으로 이동하던 이들은 곧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설치한 매복 공격에 직면했다. 중공군은 보유한 모든 자동화기를 쏟아붓고 수류탄 세례를 도로에 퍼부었으며, 순식간에 그 도로는 시체와 파손된 장비로 뒤덮였다.
운산 전투에서 제8기병연대는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했다. 여기에 105mm 곡사포 12문, 전차 9대, 트럭 약 125대, 무반동포 12문도 함께 잃었다. 이후에도 짧지만 마찬가지로 격렬한 교전이 거듭되었고, 드디어 11월 7일 중공군은 미군과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유엔군은 밀려나 청천강을 건너 후퇴했다.
맥아더의 잘못된 판단
맥아더 장군과 그의 참모진은 이제 한국에 중공군 위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식했지만, 그 심각성을 결코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공격이 북한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중국의 단순한 무력 시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압록강 이북 지역에 대한 정찰이 제한됨에 따라 맥아더는 상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압록강 철교 폭격 허가를 받았을 때는 이미 중공군 주력이 한반도에 진입한 뒤였다. 훗날 맥아더는 이 금지 구역을 두고 유머러스하게도 '만주 성역(Sanctuary of Manchuri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무지가 맥아더의 상급 지휘부가 추진한 '성역' 정책의 결과였는지, 유엔 조직의 비효율 탓인지, 아니면 맥아더 본인의 판단과 해석에 있던 중대한 오류 때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 쪽이든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상황을 단편적으로만 파악한 유엔군은 11월 공세를 승리를 확정짓고 크리스마스 전에 귀국하기 위한 마지막 대규모 작전으로 여겼다.
11월 공세의 계획
공세 계획에 따르면 월턴 워커(Walton Walker)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8군이 청천강 일대에서 북서쪽으로 광범위한 전선을 따라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8군은 미군 4개 사단, 한국군 4개 사단, 영연방 제27여단, 그리고 터키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동시에 동쪽 120km 지점에서는 미군 3개 사단, 한국군 2개 사단, 영국 해병 코만도 및 기타 부대로 구성된 제10군단이 북동쪽으로 진격한 뒤 좌회전하여 제8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현실은 더 이상 크게 엇갈릴 수 없었다.
중공군의 대반격
11월 25일 밤부터 26일까지, 산맥 서쪽에서 진격하던 유엔군은 무려 18만 명의 중공군과 정면으로 조우했다. 제8군의 우익이 공격의 주타격을 감당해야 했다. 늘 그렇듯 중공군은 나팔 소리, 호루라기, 피리, 북소리와 함께 맹렬히 돌격해 왔다. 가파른 골짜기의 어두운 저지대를 뚫고 침투하는 데 성공한 중공군은 갑자기 유엔군의 배후에 출현해 부대를 고립된 집단으로 분할시킨 뒤, 완전 섬멸을 노리는 광신적인 의지로 공격을 퍼부었다.
장비 면에서 우월한 적에 맞선 중공군은 기습, 신속성, 야간 기동, 기동성, 그리고 공포심에 기반한 전술을 구사했고, 그들의 성공은 완벽했다. 제8군 우익을 담당하던 한국군 3개 사단이 덕천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미 제2사단 역시 홀로 격렬한 공세에 맞서야 했는데, 5,000명 중 4,000명 이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포병 화력, 통신 장비, 공병 병력의 대부분도 상실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