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델레로스(Rodeleros): 르네상스 시대 스페인의 '특수부대'

로델레로스(Rodeleros)는 들고 다닌 작은 원형 방패에서 이름을 딴 병과다. 검으로 싸웠기 때문에 '검사(espadachines)'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악명 높은 콩키스타도르 군단의 핵심 전력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활약하며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스페인이 치른 거의 모든 전쟁에 참전했다.

로델레로스(Rodeleros): 르네상스 시대 스페인의  특수부대

방패와 검, 로델레로스의 무장

'로델레로스'라는 명칭은 '론델라(rondela)', 즉 지름 20~25cm의 작은 원형 방패에서 유래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방패는 점점 커져 지름 60cm에 달하게 되었다. 주무기는 검이었다. 초기에는 평균 전장 90cm 내외의 중세 양날 보병용 검을 사용했으며, 후기에는 에스파다 로페라(espada ropera)나 레이피어처럼 날이 좁고 긴 검으로 교체되었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와 고눌랄라 편제

검사들은 아랍 세력과 싸우던 스페인군에서 한 형태의 경보병으로 등장했다. 어떤 지형에서든 집단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종이었으나, 처음에는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이후 그 운용은 점차 제도화되었다. 고눌랄라(colunella) 편제의 창시자인 스페인의 명장 곤살로 데 코르도바(Gonzalo de Córdoba)는 군사사를 연구한 끝에, 주무기로 검을 다루는 로마 군단병과 같은 병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병력 1,500명으로 구성된 각 고눌랄라에는 약 650명의 파이크 창병, 비슷한 숫자의 아르케부스 총병, 그리고 200명 안팎의 로델레로스가 배치되었다. 로델레로스의 임무는 아군 창병과 적 창병이 서로의 창을 걸어 엉켜 있는 교전 상황에서 측면으로 돌격해 들어가, 긴 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적 창병들을 베어 넘기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그리스에게 참패였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와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군이 선보인 전법과 맥락을 같이한다.

중무장과 테르시오 편제로의 계승

코르도바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흉갑과 투구를 갖추게 하고, 금속판으로 덮인 가장 큰 방패를 지급하는 등 중무장시켰다. 이 전술은 고눌랄라를 계승한 테르시오(tercio) 편제에서도 로델레로스 중대가 상설 편제로 유지되며 30년 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이탈리아 전쟁의 주역

이탈리아 전쟁(1495~1556)에서 로델레로스는 문자 그대로 역사를 썼다.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패배를 막아낸 것도 이들이었다. 로델레로스는 통상 아군 창병 대열 뒤에 위치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돌격했다. 빠르고 민첩한 이들은 일단 근접 거리에 들어서면, 거대하고 다루기 힘든 파이크를 든 적 창병이 더 이상 대응할 수 없었다.

때로는 선봉으로도 배치되었지만, 이 경우에는 아르케부스 총병과 창병 부대로 증강되었다. 무장 수준과 개방 진형이라는 전투 방식 때문에 단독으로는 적 기병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대륙 정복의 핵심 전력

로델레로스는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소규모 '군단'의 핵심이기도 했다. 1520년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멕시코에서 거느린 총 병력 1,300명 가운데 1,000명이 로델레로스였다. 코르테스의 정복기를 남긴 베르날 디아스(Bernal Díaz)조차 코르테스 휘하에서 싸운 로델레로스 출신이었다. 1521년 코르테스가 운용한 병력 중 로델레로스는 700명이었던 반면, 아르케부스 총병과 석궁병은 겨우 118명에 불과했다.

화약의 시대, 그리고 소멸

테르시오 편제가 도입된 이후 로델레로스의 존재 가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장에서 화기의 수가 늘고 그 중요성이 커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로델레로스는 파이크 창은 피할 수 있었지만, 머스킷의 총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어 30년 전쟁 초기에는 자신이 속한 부대의 군기를 지키는 임무만을 맡았고, 마침내 하나의 병종으로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군제 개혁가 마우리츠 판 나쏘(Maurice of Nassau)는 스페인의 라이벌을 본떠 네덜란드군에 유사한 부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세기, 나아가 18세기의 일부 군사 이론가들은 파이크(사리사)를 대규모 주력 보병 무기로 부활시키는 것과 함께 검사 부대를 유럽군에 재도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현실이 되지 않았고, 로델레로스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