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기갑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军에서 가장 유명한 부대 중 하나였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에르빈 롬멜이 지휘관으로서 보여준 눈부신 활약 덕분이지만, 이 부대는 동부 전선의 혹독한 전투에서도 역시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경기계사단으로 탄생하다
제7기갑사단의 모체는 1938년 튀링겐에서 창설된 제2경기계사단이다. 창설 당시 이 사단은 전차 1개 대대(제66전차대대), 제6·제7차량화기병연대, 제7정찰연대, 제78포병연대(2개 포병대대), 제58공병대대, 제42대전차포대대, 그리고 통신중대와 방공포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목할 점은 제66전차대대가 Pz I과 Pz II 경전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Pz I은 기관총 2정으로 무장했고, Pz II에는 20mm 경포와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폴란드 침공 참전
이러한 편성으로 제2경기계사단은 제10군 예속 하에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바르타 강 방어선 돌파 작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부주라(Bzura)에서 벌어진 폴란드군의 반격 저지, 그리고 바르샤바 공격에도 참여했다.
제2경기계사단은 1939년 10월 1일까지 폴란드에 주둔한 뒤 독일로 귀환하여 기갑사단으로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제7기갑사단'으로 명명된 이 부대는 3개 대대 규모의 제25전차연대를 갖추었으며, 그중 하나가 기존의 제66전차대대였다.
프랑스에서의 개편과 영광
제25전차연대에는 구식 전차 104대(Pz II 72대, Pz I 32대)와 체코 설계의 경전차인 Pz 38(t), 이른바 '프라가'가 지급되었다. 이 전차들은 37mm 포를 장착해 초기형 독일 Pz III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반면 중전차인 Pz IV는 겨우 23대에 불과했다.
기병연대들은 각각 2개 대대 규모의 '엽병(Jäger)' 연대로 개편되어 함께 제7차량화보병여단을 구성했다. 제7정찰연대는 해체되고 제7정찰대대로 대체되었으며, 제83통신대대도 새로 배속받았다.
이러한 편성으로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이 사단은 '유령사단(Gespensterdivisio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롬멜의 과감한 지휘 아래 뫼즈 강 방어선을 돌파한 사단은 폭풍 같은 속도로 진격하며 가로막는 프랑스군의 저항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전투 초기 단계에서만 프랑스군 포로 1만 명 이상을 생포하고, 프랑스 전차 100대 이상과 기타 장갑차량 30대, 야포 27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단이 입은 피해는 전사 35명, 부상 50명에 불과했다.
프랑스 전역 전체로 보면 이 사단은 포로 97,468명을 확보했고, 지상에서 프랑스 항공기 67대, 화포 277문, 대전차포 64문, 전차 및 장갑차량 458대, 기타 차량 최소 5,500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반면 사단 자체의 손실은 전사 682명, 부상 1,643명, 실종 285명, 전차 42대였다.
동부 전선, 소련과의 전쟁
소련 침공을 앞두고 제7기갑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했다. 개전과 함께 사단은 화살처럼 진격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소련군이 전차 수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사단의 제78포병연대 하나만으로도 소련 전차 263대를 격파했다.
11월 15일까지 사단의 인적 손실은 겨우 1,100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혹한과 소련군의 반격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42년 1월까지 사단 보병은 창설 당시 전력의 거의 60%를 잃었다.
전차 손실도 처참했다. 어느 시점에는 사단이 사용 가능한 전차를 단 5대만 남게 되기도 했다. 1942년 1월 23일까지 사단은 원래 병력 14,400명 가운데 9,000명을 잃었다!
재정비와 비시 프랑스 점령
1942년 봄, 사단은 손실 보충과 재정비를 위해 프랑스로 후송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중장갑 전차는 지급받지 못했다. 사단이 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차는 Pz III Ausf. J 35대와 Pz IV Ausf. G 30대였다.
같은 시기 제7차량화보병여단 사령부는 해체되었고, 산하 2개 연대는 기갑척탄병연대로 개칭되었다. 새로운 편성을 갖춘 사단은 독일군의 비시 프랑스 점령 작전에 참여한 뒤 다시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제7기갑사단은 처음에 스탈린그라드 참패로 흔들리고 있던 독일 전선의 남쪽 끝에 배치되었다. 당시 사단이 보유한 전차는 고작 95대였다. 그럼에도 1월과 2월 사이 사단은 소련 전차 254대, 각종 화포 300문, 기타 차량 400대 이상을 파괴하면서 자신은 전차 12대만 잃었다.
이후 사단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독일군 공세에 참전해 처참한 손실을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예프와 타르노폴에서 포위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사단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빠져나왔지만, 이때 남은 전력은 전차 9대, 화포 9문, 대전차포 11문, 병력 1,872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단은 1944년 소련군의 대여름 공세에 맞서 계속 싸웠다. 이후 메멜 전투에 참여했고, 배로 동프로이센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사단은 전투 끝에 장비를 모두 잃었다. 잔존 병력 일부는 포메라니아 북부로 옮겨져 마지막 전투인 베를린 전투에 참여했다.
다행히 상당수 병력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사단은 1945년 5월 3일 독일-덴마크 국경의 슈베린에서 공식적으로 영국군에 항복했다.
롬멜 외에도 이 사단을 지휘한 유명한 지휘관으로는 훗날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을 지휘한 마지막 장군이 된 게오르크 슈투메(Georg Stumme)와 기갑 에이스 하소 폰 만토이펠(Hasso von Manteuffel)이 있다.

사진: 1940년 프랑스에서 활약한 제7기갑사단의 Pz IV, Pz 38(t), Pz II 및 각종 차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