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르 글로앙
격추 전과
총 18기 격추 (확정 18기, 추가 추정 3기)
생애

영국 해협 너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전투기 에이스인 피에르 르 글로앙(Pierre Le Gloan)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출신은 극히 평범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1913년 1월 6일에 태어난 그는 국가 장학금 덕분에 항공에 대한 열정을 펼칠 수 있었고, 1931년 12월 군 항공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1932년 8월 7일, 당시 병장이던 피에르 르 글로앙은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계속 복무하기를 자원한 그는 1933년 9월 제6비행단 전투 비행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부대 안에서 손꼽히는 저격수로 인정받고 훈련 교관으로서의 자질까지 갖추게 된 그는 1936년 10월 20일 중사로 진급하며 편대장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후 1938년 2월 직업 부사관이 되었고, 부대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이동했습니다. 샤르트르에서 GC III/6 비행단이 창설되자 상사 르 글로앙은 제5비행중대에 배속되었습니다. 모랑 MS.406을 장비한 이 부대는 1939년 9월 4일 베즈-부이양시로 전배되어 파리와 센강 하류 유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프랑스 침공을 결행하며 이탈리아가 참전했습니다. 사흘 뒤 원사 르 글로앙은 이탈리아 BR.20 폭격기 두 대를 격추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그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게 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단 한 번의 출격에서 무려 다섯 대의 적기를 격추한 것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두 번째로 달성된 기록이었습니다. 확인된 11개의 격추 기록을 보유하게 된 르 글로앙은 소속 비행단 최초의 에이스로 등극했습니다.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이 발효되자 르 글로앙과 그의 부대는 북아프리카로 철수했습니다. 1941년 5월, GC III/6 비행단은 비시 정부 관할 아래 시리아 지역 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더 중요한 전선에 병력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레바논과 시리아의 방어를 전적으로 비시 정권에 맡긴 상태였습니다. 한 달 남짓 지속된 이 전역에서 소위로 진급한 르 글로앙은 영국군 허리케인 전투기 여섯 대와 글래디에이터 한 대를 격추하며, 자신의 확정 격추 기록을 18기로, 추정 기록까지 포함하면 21기로 끌어올렸습니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이후, 현지에 잔류하던 비시 정권군은 결국 연합군 진영에 합류하기로 합니다. 르 글로앙도 그중 한 명이었으며, 1943년 8월 13일에는 P-39 에어라코브라를 장비한 '루시용(Roussillon)' 비행중대, 즉 소속 비행단의 제3비행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1일, 운명의 날이 찾아옵니다. 르 글로앙과 콩콤(Colcomb) 중사는 이른 아침 해안 초계 임무를 위해 이륙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던 중 엔진이 갑자기 정지하자, 그는 즉시 강제 착륙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비행기의 보조 연료탱크가 투하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고, 기체가 지면에 닿는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공군의 최고 에이스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