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확인된 격추 기록: 8승 (소련제 I-15로 3승, I-16으로 5승)
생애
프랭크 G. 팅커 주니어(Frank G. Tinker Jr.)는 1909년 미국 아칸소주 드윗(De Witt)에서 태어났다. 그는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와 텍사스 랜돌프 필드(Randolph Field) 육군 비행학교를 거쳤으며, 펜사콜라에서 해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싸움과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던 팅커는 1936년 말 스페인 정부에 지원 의사를 밝혔다. 멕시코 주재 스페인 대사는 그를 영입하며 월급 1,500달러와 국민파(Nationalist) 항공기 1대 격추 시 동일한 금액의 포상을 약속했다. 그는 스페인 여권을 발급받았고, 이때부터 '프란시스코 트레호(Francisco Trejo)'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팅커는 로스 알카사레스(Los Alcázares)에서 공화파 연방 부대에 합류해 브레게 XIX(Bréguet XIX)로 훈련을 마쳤다.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마니세스(Manises)에서 미국·영국 자원비행사들로 구성된 부대에 자리를 옮겼다. 브레게 XIX로 작전을 시작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테루엘(Teruel) 상공의 몇몇 임무에 참여했지만, 폭격기 조종사로서였다. 이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은 팅커는 배치 변경을 요청했고, 이후 저명한 안드레스 가르시아 라 카예(Andrés García La Calle) 대위가 지휘하는 소련제 I-15 전투기 중대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배속되었다.
첫 공중전과 첫 승리
1937년 2월 18일, 팅커는 하인켈 He 51기를 상대로 첫 공중전을 치렀다. 신속한 소련제 I-16기들의 개입 덕분에 간신히 격추를 피할 수 있었지만, 미국 동료 두 명은 그렇지 못했다. 3월에는 사라고사(Zaragoza)를 출발해 마드리드로 진군하는 이탈리아군에 대한 지상 공격 임무에 투입되었다. 한 차례 순찰 비행 중 이탈리아 피아트 CR.32기를 성공적으로 붙잡아 첫 승리를 거두었다.
중대장 승진과 I-16 탑승
1937년 5월, 팅커에게 두 가지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첫째, 라 카예가 항공단 지휘관으로 올라가면서 팅커가 중대장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당시 숙련된 파일럿들이 속속 줄어드는 가운데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이러한 실력이 승진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스페인 정부와 소련 측의 허가를 받아 당시 가장 강력한 전투기 중 하나였던 소련제 I-16을 몰 수 있게 된 것이다. 5월 30일, 그는 I-16의 첫 비행을 큰 즐거움과 함께 경험했다.
며칠 후, 그는 이탈리아 피아트기를 격추하고 엔진에 불을 붙였다. 나아가 낙하산 끝에 매달린 조종사마저 사살했는데, 팅커는 일부러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늘 부인했다. 6월, 그는 I-16을 몰다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다가, 거의 만취 상태로 시민경비대(Civil Guards)와 언쟁을 벌이다 배에 총탄을 맞았다. 다행히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고, 7월 12일 그는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며칠 후, 그는 콘도르 군단(Condor Legion)의 최신형 메서슈미트 Bf 109기들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전쟁의 끝과 비극적인 최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팅커는 이미 7개월 넘게 싸워왔다. 확인된 전적은 8승(I-15로 3승, I-16으로 5승), 은행 계좌는 가득 차 있었다. 8월, 그는 스페인을 떠나 완전히 황폐해진 마음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회고록을 집필했지만 생각은 늘 스페인에 머물러 있었고, 온갖 방법으로 재귀환을 시도했다. 옛 중대 동료가 찾아와 중국에서 싸울 자원비행사 부대를 함께 꾸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출발을 앞두고 그는 공화파가 무기를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접한다.
1939년 6월 13일, 리틀록(Little Rock)의 작은 호텔 직원들은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소식을 견디지 못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