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전투란 무엇인가?
마른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랑스 마른 강 일대에서 두 차례 벌어진 대규모 전투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마른 전투'라고 하면 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치러진 첫 번째 전투를 의미하며, 두 번째 전투는 1918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전쟁의 발발과 파리를 위협한 독일군
1914년, 프랑스·영국·러시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871년의 굴욕적인 패배를 잊지 못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침공했고, 수도 파리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9월에 벌어진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은 밀려났고, 이후 양측 군대는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마른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 전투는 독일의 서부 침공 계획인 '슐리펜 계획'의 실패를 확정지었으며, '바다로 가는 경주'라 불리는 기동전 국면 이후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위치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갈리에니 장군과 유명한 '택시 부대'
1914년 가을, 연합군은 국경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전면 후퇴 중이었고, 영국 원정군은 채널 해협 항구로 철수해 재상륙할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파리 방어를 담당하던 프랑스군 사령관 갈리에니(Gallieni) 장군은 영국의 키치너 경을 만나, 독일군이 마른 강에 도달했을 때 연합군 전체가 합동 반격에 나서자고 제안했습니다.
9월 2일, 독일군은 항공 정찰 결과에 따라 행진 방향을 동쪽으로 바꿨습니다. 당시 항공 관측이 실전에 활용된 초기 사례 중 하나였으며, 이는 로렌 지방에서 오는 프랑스군을 포위하려는 위협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조프르(Joffre)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은 파리에서 모뉴리(Maunoury) 장군이 지휘하는 새로운 제6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갈리에니는 이 부대를 활용해 9월 5일 오후, 낭퇴유르오두앵과 모(Meaux) 사이 마른 강 일대에서 폰 클루크(von Kluck)가 지휘하는 독일 제1군의 측면을 공격했습니다.
9월 7일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한 제6군은 9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텨냈습니다. 특히 갈리에니 장군이 긴급히 징발한 파리 시내 택시 약 600대로 파리 수비대 병력 약 6,000명을 포함해 총 1만 명을 전선으로 급파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주로 르노 AG(Renault AG) 차량으로 이루어진 이 수송 작전은 자동차 부대, 나아가 민간 차량을 동원한 군사 수송의 초기 사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 허점
9월 9일, 제6군은 결국 마른 강 너머로 물러났습니다. 폰 클루크는 이 부대를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추격을 감행했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전진으로 우익에 위치한 카를 폰 뷜로(Karl von Bülow)의 독일 제2군과의 사이에 약 50km에 달하는 빈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제5군과 영국 원정군은 이 틈을 파고들어 측면이 노출된 두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이 기동에 혼란에 빠지고, 이전의 강행군으로 지쳐 있으며, 병력에서도 열세였던 두 독일군은 결국 9월 13일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합군을 포위 섬멸하는 임무를 맡았던 독일 최강의 두 개 군이 멈춰 선 것은 곧 슐리펜 기동의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이긴 전투, 놓친 승리'
당시 젊은 기병 장교였던 샹브(Chambe) 장군의 표현을 빌리면, 이 전투는 "이긴 전투였지만 놓친 승리"였습니다. 영불 연합군은 폰 클루크, 폰 뷜로, 폰 몰트케가 지휘하는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들을 프랑스 영토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독일군은 겨우 북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밀려날 뿐이었고, 이후 '바다로 가는 경주'가 이어지면서 전선은 고정되었고, 4년간 지속될 참혹한 진지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함께 알아두면 좋은 사실
- 프랑스의 유명 육상 선수 장 부앵(Jean Bouin)과 작가 샤를 페기(Charles Péguy)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통치 능력에 대한 의문이 커졌고, 이에 독일 지식계는 1914년 10월 4일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93명의 독일 지식인이 서명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독일의 지배층과 지식인 계급이 황제 빌헬름 2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