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라파예트 비행중대: 제1차 세계대전 하늘의 미국인 영웅들

라파예트 비행중대: 제1차 세계대전 하늘의 미국인 영웅들

피로 물든 유럽의 하늘, 전사들의 초상

1916년, 피로 물든 유럽의 하늘에서 두각을 나타낸 미국인 비행사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투기 조종사의 이미지를 정립했습니다. 관대함, 사심 없음, 대담함, 품격,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는 무모함. 그들은 보앵(Voison)과 스파드(SPAD) 전투기에 몸을 싣고 격렬한 공중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산 채로 불타죽을 공포, 기계적 결함의 불확실성, 적진에 불시착할 두려움과 맞서며 싸웠습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라파예트 비행중대 조종사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전쟁에 휘말려, 마치 가혹한 규칙을 가진 영웅적 스포츠인 '공중 결투'에 매료된 자원병처럼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프랭크 루크와 조지프 웨너: 용기와 희생의 기록

1918년 9월 18일, 프랭크 루크 주니어 중위와 조지프 웨너 중위는 독일군의 관측용 계류 풍선 '드라헨(Drachen)' 사냥 임무로 출격했습니다. 루크가 풍선을 공격하는 동안 웨너는 독일 전투기의 요격을 막아섰습니다. 루크는 '소시지'라 불리던 풍선 2기를 격추했지만 전우를 잃었습니다. 포커(Fokker) 편대가 이들을 덮쳤고, 웨너는 적기 3대를 격추하며 루크의 목숨을 구하고 스스로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귀환 후 루크는 임무 보고서에 "오늘의 승리는 웨너 중위에게 돌려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평소 전과를 독차지하던 그답지 않은 고백이었습니다. 전우의 죽음 이후 루크의 '독일 사냥' 집념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자만심과 기괴할 정도로 풍선 공격 임무를 즐기는 성향 탓에 동료들에게 외면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드라헨은 기관총과 고사포로 중무장하고, 저공 엄호기와 고공 포커 편대의 보호를 받는 죽음의 함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종사가 기피하거나 운명에 맡기는 임무였지만, 루크는 이를 즐겼고 전과는 20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신경쇠약이 찾아왔고, 규율을 경시하던 그는 무단 이탈 후 비행 금지 처분을 받자 "주의! 불타는 풍선이 떨어진다. 루크"라는 메모를 남긴 채 스파드를 몰고 출격했습니다.

그는 1호 풍선을 격추시킨 데 이어, 치열한 대공포화 속에서 2호와 3호까지 격추했습니다. 기체가 피격되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으나, 뮈르보(Murvaux) 인근 독일군을 기총소사하며 밭에 불시착했습니다. 기체에서 빠져나와 물 한 모금 마시고 권총을 든 채 적을 기다리다 최후를 맞았습니다. 21승(공인 18승)으로 에디 리켄배커 대위(26승)에 이어 미국 에이스 2위에 올랐습니다.

"피의 4월"과 미국의 참전

미국은 1917년 4월 참전했지만, 미 육군 항공대가 유럽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작전을 펼친 것은 1년 뒤였습니다. 미국은 1914년 10월 5일, 프랑스 보앵기가 독일 아비아틱(Aviatik)을 격추하며 역사상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진 이후 이어진 눈부신 기술·전술 혁신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한때 포커 아인데커(Eindecker) 단엽기가 제공권을 장악했으나, 곧 프랑스 전투기와 영국 DH.2 등 프로펠러 기체에 밀렸습니다. 양측 모두 프로펠러 원판을 통해 총탄을 발사하는 동기화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롤랑 가로스(Roland Garros)가 프로펠러 날에 편향판을 부착해 총탄을 튕겨내는 방식을 처음 선보였고, 포커는 슈나이더(Schneider)의 설계를 바탕으로 프로펠러 축에 캠(cam)을 장착해 날개가 총구 앞을 지날 때 사격을 중단시키는 보다 정교한 동기화 장치를 완성했습니다.

전쟁 중반, 영국 원정군(BEF) 전선에서는 독일의 제공권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영국 공군이 프랑스와 독일의 기술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 대위가 이끄는 야크트슈타펠 11(Jasta 11)은 더 빠르고 튼튼하며 무장이 강력한 알바트로스(Albatros)로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리히트호펜은 영국의 에이스 호커(Hawker) 소령을 30야드 거리에서 머리에 관통상을 입혀 격추시켰고, 호커는 무인지대의 진흙 속에 묻혔습니다. 미국이 참전한 1917년 4월은 영국 공군에게 "피의 4월(Bloody April)"로 기록되었습니다. 카멜(Camel), 소위드 삼엽기(Sopwith Triplane), S.E.5 등의 신형기 투입으로 상황이 다소 나아졌지만,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비해 끊임없이 6개월 뒤처졌고, 프랑스로부터 다수의 전투기를 지원받아야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실전 세례를 받을 무렵, 많은 영웅이 이미 스러졌습니다. 독일의 막스 임멜만(Max Immelmann, '릴의 독수리')은 1916년 6월 전사했습니다. 1916년 5월부터 1917년 5월까지 영국의 앨버트 볼(Albert Ball)은 프랑스의 대형 에이스들과 명성을 겨루다 프레누아(Fresnoy)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독일 조종사와의 전투 중 기이하게 전사했습니다. 기체엔 탄흔만 희미할 뿐이었습니다. 독일의 오스발트 뵐케(Oswald Boelcke)는 공중 충돌로 1916년 10월 산화했고, 에이스 중의 에이스 조르주 기네메르(Georges Guynemer) 대위도 1917년 9월 11일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가혹한 임무 환경, 추위, 극도의 긴장, 산 채로 타죽을 공포는 몽상가와 모험가들을 걸러냈습니다. 많은 조종사가 낙하산 없이 불타는 기체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영국 공군 최고의 에이스 에드워드 매넉(Edward Mannock) 소령은 화재 시 자결용으로 장전된 권총을 항상 휴대했습니다. 한 아비아틱 조종사는 모든 비행사가 공유한 공포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휘발유가 새고 배기관에서 불꽃이 튄다. 작은 불씨 하나면 끝장이다. 조종석과 날개는 얼어붙는 휘발유로 뒤덮인다. 차라리 머리에 총을 쏘는 게 낫다." 낭만은 하늘에 없었습니다. 진정한 프로만이 살아남았고, 그마저도 장담 못 했습니다. 샤를 뉘게세르(Charles Nungesser)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위대한 에이스가 신경쇠약과 공황을 겪었습니다. 신참들은 계기판에 점심 토해내기 일쑤였고, 공포에 얼어붙어 적 기관총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돌진하기도 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격투가들은 종종 평범한 파일럿이었지만, 사격술이 뛰었고 강철 같은 담력을 지녔습니다.

미국에 배울 것이 산더미였습니다. 연합국이 장비와 전술에 씌운 비밀의 장막 탓에 미국 항공 기술은 수년 뒤처졌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국 기체인 커티스 JN-4 '제니(Jenny)'와 토머스 모스 S4C는 훈련용으로나 간신히 쓰였습니다. 전장이 길어지자 미국은 유럽 설계 기체를 라이선스 생산하고 자국산 리버티(Liberty) 400마력 V12 엔진을 얹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프랑스의 항공대 접수창고에서 정밀 분해 수리를 거쳐야 했습니다. 미군 수뇌부는 항공을 이해하지 못했고,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장군은 "우리의 참모부가 도자기 가게에 들어온 코끼리만큼이나 서툴게 공군을 지휘하려 든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국 참전 전부터 프랑스·영국 공군에 합류한 미국 시민들이 1917~18년 유럽에 상륙한 신병들에게 비행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조지 A. 본(G.A. Vaughn) 중위는 영국 제84편대에서 S.E.5a(울슬리 바이퍼 200마력 엔진 장착)로 첫 전과를 올린 뒤 미 제170편대로 전속했습니다. 찰스 J. 비들(Charles J. Biddle)은 외인부대에 입대해 유명 '황새 편대(SPA 73)'에서 복무하다 1918년 1월 미군에 인계되었습니다.

독일의 항의와 라파예트 비행중대의 탄생

라파예트 비행중대: 제1차 세계대전 하늘의 미국인 영웅들

가장 극적인 미국인 기여는 단연 라파예트 비행중대(Lafayette Escadrille)였습니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영향력 있는 미국인 노먼 프린스(Norman Prince)의 주선으로 전원 미국인으로 구성된 항공 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 중대(America Squadron)'로 명명되었으나, 주미 독일 대사가 "중립국 미국이 중립법을 위반했다"며 강력 항의해 '라파예트'로 개명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편에서 비행한 모든 미국인은 통칭 '라파예트 비행단(Lafayette Flying Corps)' 참전용사로 불리지만, 실제 라파예트 비행중대에서 복무한 것은 소수 정예였습니다. 비들처럼 외인부대에서 시작한 이들도 있었고, 가족이 막 이민 온 유럽에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 '신흥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파벨카(Pavelka), 마송(Masson), 제네(Genet), 채프먼(Chapman), 홀(Hall), 록웰(Rockwell) 등 이름은 그들의 다양한 출신을 보여줍니다.

훈련 중 기체를 박살 내고 제 얼굴을 다치기 일쑤였습니다. 비번엔 술을 마시고 여자를 쫓아다녔고, 그들의 행적은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 미국인들은 최고급 호텔과 최고 미녀들의 계산서나 치러주러 온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돌았습니다. 고등사령부는 이들을 베르덩 전선으로 보냈고, 잡음은 사라졌습니다. 프랑스 장군 테노(Thénault) 대위의 지휘 아래 뉴포트(Nieuport)기를 몰고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적의 피값을 치렀습니다. 빅터 E. 채프먼이 1916년 6월 23일 포커기에 격추되어 첫 전사자가 되었고, 키핀 예이츠 록웰(Kiffin Yates Rockwell)은 전쟁법으로 금지된 둠둠탄(Dum-dum bullet)에 시신이 찢겨 숨졌습니다. 그의 형도 같은 중대원이었습니다. 프린스는 폭격기 호위 임무 후 야간 착륙 중 송전선에 걸려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전투를 거치며 중대는 브랜드를 구축했습니다. 비번엔 파리의 고급 카페와 최고급 '사교장'을 드나들며 세련되게 놀았습니다.

라울 루프베리: 고독한 행운아

실전에서는 강했고, 가장 터프하고 기행이 심한 이는 단연 에이스 라울 루프베리(Raoul Lufbery)였습니다. 그는 모험가였습니다. 프랑스 혈통으로 1908~1910년 필리핀 전쟁 때 미군 편에서 싸웠고, 시민권 취득을 위해 입대했다가 전시 비행사 푸르프(Pourpe, 캘커타에서 곡예 비행을 했다고 하나 불확실)와 팀을 이뤘습니다. 둘은 깊은 우정을 나눴고, 루프베리는 정비사로 뛰어나 필리핀 전쟁 때 조종사들이 그가 손본 기체만 선호했습니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푸르프가 프랑스 공군에 입대했고, 루프베리도 외인부대 정비사로 따라갔습니다. 푸르프가 전사하자 정비사가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보앵기를 타다 1916년 4월 라파예트 중대로 전속했습니다. 7월 첫 승, 10월엔 6승을 올렸고 곧 미국인 에이스 1위에 올라 찬사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혈통 덕분에 파리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17승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군사 메달, 10개의 종려잎이 달린 전쟁십자장, 영국 수훈십자장을 받았고, 이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사는 경주용 자동차까지 선물했습니다. 사진 속 그는 경주차 운전석에서 환호하지만, 실제 그는 언론이 그린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조르주 기네메르의 연약한 체구와 슬프고도 불굴의 시선, 마타 하리의 친구이자 베를린의 첩보망에 허위 정보를 흘린 '여심 사냥꾼' 샤를 뉘게세르의 매력도 없었습니다. 루프베리는 그저 친구들과 파리로 달려가 여자와 주색잡기를 즐겼습니다. '위스키(Whisky)'라는 새끼 사자를 샀고, 자연스레 둘째 이름은 '소다(Soda)'였습니다.

프랑스 최고 에이스들과 교류하며 인기가 많았지만, 루프베리는 언제나 고독했습니다. 1916년 당시 31세로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깊은 유대도, 가족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친구 푸르프를 잃은 뒤였습니다. 영국 에이스 매넉처럼 고독한 그는 본보기로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비행 불가 기상엔 혼자 숲을 거닐며 버섯을 채취했습니다. 앨버트 볼이 채소를 가꾸고, 임멜만이 개와 어머니에게 보내는 일상 편지 외엔 세상이 없던 것과 닮았습니다.

1918년 1월 미 육군 항공대에 소령으로 편입되며 책상물림 신세가 되자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금테 모자(장성들)'가 실수를 깨닫고 3월 제94항공대대(94 Aero Squadron) 지휘권을 주었습니다. 부임하니 뉴포트 기체에 기관총이 없었습니다! 4월 초 문제가 해결되어 미국 조종사들이 다시 전투에 나섰습니다.

4월 15일, 캠벨(Campbell)과 윈슬로(Winslow) 중위가 아군 상공을 맴돌던 알바트로스와 팔츠 D.III를 각 1대씩 격추했습니다. 한 달 뒤인 5월 19일, 독일 복좌 정찰기가 다시 아군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루프베리는 뉴포트로 출격해 첫 공격 후 이탈했습니다(기관총 고장 추정). 적기 꼬리를 물고 재공격했고, 알바트로스는 격추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에 질린 목격자들은 루프베리의 뉴포트 엔진에서 화염이 치솟으며 완만히 강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불타는 비행기에 남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부류였습니다. 기체에서 떨어진 그의 시신은 약 80m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부는 그가 기체와 자신의 낙하 지점을 운하 쪽으로 조종하려 했다고 증언했으나, 실제론 참혹하게 불탄 시신이 들판에 떨어졌습니다.

미국 첩보부의 의심을 산 에이스, 에디 리켄배커

연합군 조종사에게 낙하산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수뇌부(그중 조종사 출신은 없었다)는 낙하산을 주면 기체를 살리려 하지 않고 뛰어내릴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독일도 비행선 승무원에겐 같은 논리를 폈으나, 항공 당국은 잘 훈련된 조종사가 비행기보다 가치 있다 판단해 낙하산을 지급했습니다. 독일 에이스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 중위는 낙하산 덕분에 살아남아 62승으로 전쟁을 마쳤습니다.

미국 에이스 1위 자리는 에디 리켄배커(Eddie Rickenbacker)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는 전직 레이서이자 퍼싱(Pershing) 장군의 전직 운전기사였습니다. 루프베리 전사 며칠 전, 알바트로스 단좌기를 첫 전과로 올렸습니다. 독일식 성씨(원래 '리켄바허 Rickenbacher') 탓에 미국 첩보부의 끊임없는 의심을 받았습니다(웨너 중위도 마찬가지). 빌리 미첼 장군의 전폭적 지원으로 간신히 항공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94추격대대(휘장: 고리 안의 모자) 지휘관을 맡은 리켄배커는 진정한 팀 캡틴처럼 부대를 전선으로 이끌었습니다. 지상과 공중 모두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아함, 규율, 체력(새벽 체조와 완벽한 비행장 관리)이 구호였습니다. 중대의 결속과 전우애가 사기와 전투력의 기반이라 믿었습니다. 부임 당시 중대 전과는 평범했으나, 그의 지휘 아래 94대대는 선두를 달려 다시는 내주지 않았습니다. 부대는 타 대대보다 많은 비행 시간을 기록했고, 리켄배커 개인도 미국인 최다 비행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강제 입원 기간에도 전과를 쌓아 26승과 최다 비행 시간 기록으로 전쟁을 마쳤습니다.

기체와의 사투: 뉴포트 28 vs 스파드 XIII

미국 조종사들은 뉴포트 28로 고생했습니다. 프랑스가 미국·벨기에·이탈리아 동맹국에 대량 공급한 이 기체(와 아리오)는 급조된 정비병과 조종사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날개 피복이 벗겨져 허용 한계 이상 급강하하면 날개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강제 착륙이 속출했습니다. 훗날 『바운티 호의 반란(Mutineers on the Bounty)』을 중대원 찰스 노드호프(Charles Nordhoff)와 공저한 짐 홀(Jim Hall)은 적진에 불시착해 포로로 전쟁 끝을 맞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미국 조종사들은 에이스들의 사랑을 받은 스파드 XIII를 선호했습니다. 동기화된 비커스(Vickers) 기관총 2정, 200마력 이스파노-수이자 엔진, 최고 속도 210km/h 이상으로 뉴포트보다 빨랐고, 상승 한도도 6,600m로 뉴포트의 5,200m보다 높았습니다.

아군기 식별도 문제였습니다. 94대대의 리드 체임버스(Reed Chambers)는 92대대의 쿡(Cook)이 모는 살름손(Salmson) 복좌기를 독일기로 오인해 공격했습니다. 쿡은 기관총 사수의 "쏴? 말어?"라는 인터컴 외침 속에 필사적으로 기동했고, 체임버스는 살름손의 회피 기동에 사격 위치를 잡지 못해 공격을 중단했습니다. 얼마 뒤 독일 조종사가 미국 기체가 자기 복엽기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며 사격하지 않는 걸 목격했습니다. 미국인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뉘게세르도 자기를 적으로 오인한 영국 RFC 조종사를 격추해야 했고, 벨기에 에이스 윌리 콥펜스(Willy Coppens)는 영국 동료들을 불신해(식별 연습 부족? 시력?) 그들의 구역을 피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근본적으론 도색 문제였습니다. 화려한 색으로 칠한 기체는 무조건 독일기로 오인당했습니다.

리켄배커의 명성과 언론의 조명

리켄배커의 명성은 나날이 커졌습니다. "드디어 순수 미국인 에이스!" 기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한 영화 촬영에서 리켄배커가 한노버(Hannover)기와 공중전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촬영용 DH.9A 리버티 단발기에 탄 영화인은 용기 있게 접근하다 불시착했습니다. 다른 카메라로 계속 찍겠다며 리켄배커가 스파드로 한노버를 공격하는 순간 카메라가 고장 났고, 상황을 모르는 프랑스 전투기들이 실탄으로 지원 사격을 해대며 상황이 꼬였습니다. 리켄배커가 수신호로 "독일기 항복함"을 알리고 모두 무사 착륙했습니다. 물론 다들 진이 빠졌지만, 관객에겐 더미 조종사가 추락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미국 언론은 프랑스에서 훈련받은 미 항공대원들의 무용담을 대서특필했지만, 영국 RFC 휘하에서 싸운 본 중위나 킨들(F.E. Kindley) 대위 같은 동기들은 외면했습니다. 라파예트 중대만큼 오래 참전한 조종사들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브랜드 이미지가 최우선이었고, 파리의 화려한 조명 근처에서 복무한 프랑스 편대 자원병들이 언론 접촉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이 침묵은 그들이 미 육군 항공대로 편입된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구 RFC 출신들은 신편대에 그대로 묶여 영국 제4군 지원 임무라는 덜 명예로운 전선 구역에 배치되었습니다. RFC의 전과 인정 기준이 실제보다 훨씬 엄격해 공인 전과가 적었습니다.

그러나 제17·148항공대대는 영국군 지원 임무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리켄배커의 94대대보다 3개월 늦게 전선에 투입된 148대대는 종전 시점에 94대대와 맞먹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2,100시간 전시 비행에 66승 확정. 본 중위는 17대대에서 마지막 5승을 추가했습니다. 148대대 최후이자 최고의 지휘관 엘리엇 화이트 스프링스(Elliot White Springs) 대위는 12승으로 킨들 대위, 퍼트넘(D.E. Putnam) 중위와 공동 5위에 올랐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생이던 스프링스는 영국에서 수련했습니다(이탈리아 복무를 생각해 이탈리아어까지 독학했습니다). 캐나다 에이스 윌리엄 A. 비숍(William A. Bishop) 소령의 요청으로 제85편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초기엔 영국의 시선으로 볼 때 칵테일 제조법만 꿰고 비행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편대장 개인기를 들이받고, 적기 1대 격추 후 또 기체를 박살 냈습니다. 비숍은 "너 어느 편이냐? 이대로면 연합군 에이스보다 독일군 에이스 순위에 먼저 오르겠다"고 일갈했습니다.

"춤추는 기체" 소위드 카멜과의 동행

하지만 스프링스는 빠르게 실력을 키웠습니다. 창설 초기부터 제148항공대대 편대장으로 배속되었으나, 주력 기체 소위드 카멜(Sopwith Camel)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카멜은 너무 짧아서 회전 토크만으로도 제멋대로 구른다. 거기에 회전 엔진을 달아 토크를 더 키워 놨으니 더 악랄하다! 카멜 타기는 불균형 자이로스코프 타는 것과 같아. 댄서의 엉덩이처럼 들썩거리고, 노면전차 운전사 장갑처럼 지독한 냄새가 난다!"

적응한 스프링스는 어느 날 포커 3대를 무傷로 격추했습니다. 미국 언론은 148대대를 외면했지만, 종전 후 스프링스는 펜을 들어 진실을 알렸습니다. 『전쟁의 새(War Birds)』, 『콘택트(Contact)』, 『밝고 푸른 하늘 위(Above the Bright Blue Sky)』 등 저작을 통해 공중전의 실상을 생생히 전하며 전우들의 명예를 되찾아주었습니다.

그들 중엔 프랜시스 L. 베일리스(F.L. Baylies) 중위도 있었습니다. 격추되어 전선 사이에 떨어지자 기체에서 뛰어내려 프랑스 참호로 총탄 세례 속을 전력 질주해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포커 삼엽기에게 끝내 당했습니다. 퍼트넘 중위는 프랑스 제156편대에서 스파드로 비행하다 에이스 반열에 오르자마자 포커 8대와 전투 중 상부 날개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부 날개마저 찢어지며 추락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몰랐습니다. 이미 머리에 두 발을 맞고 즉사했으니까요. 미국 조종사들은 총 777회의 공인 전과를 올렸고, 80명이 독일기 5대 이상 격추로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끝, 그리고 삶

종전일, 리켄배커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전선 상공을 홀로 비행했습니다. 많은 이처럼 그는 갈 길을 몰랐습니다. 이들은 오직 훔치고 죽이는 법만 배웠습니다. 대부분 민간 항공으로 향했습니다. 생존자 일부는 곡예 비행사가 되어 관중 앞에서 공중전의 스릴을 재현하며 광대 노릇을 했습니다. 때론 피가 흘렀습니다. 엔진 고장, 금속 피로, 어리석은 조종 미숙이 독일 총탄이 실패한 곳에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킨들 대위가 그렇게 자살하듯 최후를 맞았지만, 미국 에이스들의 통상적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리켄배커는 자사 항공사를 세워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공군 고문으로 일할 만큼 장수했습니다. 또 다른 에이스 R.G. 랜디스(R.G. Landis)는 대령으로 재복무했습니다. 스프링스는 곡예 비행단 운영과 테스트 파일럿을 거쳐 집필 활동과 가업 승계로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체임버스는 비행기 보험업에 종사했는데, 그 많은 적기를 격추한 자의 말년치곤 아이러니한 결말이었습니다.

이들은 짧지만 항공사(航空史)에 길이 남을 예외적인 한 페이지를 열정으로 써내려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