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몬테 카시노 전투: 낙하산부대의 등장과 수도원 폭격의 비극

카시노에 투입된 낙하산병들

낙하산부대가 카시노 전선에 투입된 것은 1944년 2월 둘째 주였다. 그들은 적시에 도착했다. 당시 '기병 언덕(Cavalry Hill)'은 벌써 두 차례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 10일, 크라처트(Kratzert) 지휘관의 명령을 받은 제3낙하산엽병연대 소속 제3대대가 미군을 다시 몰아냈다. 이번에야말로 이 요충지는 완전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고, 그해 5월까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안치오에서 급파된 슐츠 전투단

안치오(Anzio) 전선에서 급히 이동한 슐츠(Schulz) 전투단은 리리(Liri) 계곡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경사면에 딱 붙어 버렸다. 슐츠 휘하 병력, 즉 제1낙하산 기관총 대대의 배치는 종심도 얕았고 사전에 정비된 진지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케셀링(Kesselring) 원수가 1943년 12월에 하달한 명령에 따라, 이들은 산 정상에 우뚝 선 몬테 카시노 수도원 벽에서 반경 400미터 이내의 지역을 점거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낮은 경사면을 끝까지 사수하며, 미군과 인도군이 고지를 장악하고 리리 계곡으로 진출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같은 시기, 지칠대로 지친 독일군 제44사단은 제90기갑척탄병사단과 제1낙하산사단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미 진지를 다져 온 슐츠와 크라처트 전투단이 그 선봉 역할을 맡았다.

저항의 강화가 부른 수도원의 최후

낙하산부대의 도착으로 카시노의 독일군 저항이 갑자기 강경해진 것은, 안타깝게도 수도원 자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독일군의 완강한 방어는 연합군 지도부가 품고 있던 '독일군이 수도원을 점령했으며, 이곳—전 섹터에서 가장 유리한 지점—을 방어선의 초석으로 삼고 있다'는 완전히 잘못된 확신을 더욱 굳혀 주었다. 뉴질랜드군단을 지휘하던 버나드 프리버그(Bernard Freyberg) 중장은 수도원이 폭격에 부서지기 전까지는 몬테 카시노에 대한 공격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결과 2월 15일,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베네딕트회 수도원은 무자비하고도 무의미한 포격 속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폭격은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폐허가 된 잔해는 독일 낙하산병들에게 더욱 완벽한 방어 진지를 제공했고, 그들은 이 틈새투성이의 요새에서 연합군에게 피비린내 나는 참패를 안겨 주며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