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소보 폴예 전투(세르비아어 키릴 문자: Бој на Косову 또는 Косовска битка)는 그레고리력으로 1389년 6월 28일, 율리우스력으로는 같은 해 6월 15일에 코소보의 '검은지빠귀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세르비아어로 'kos'는 검은지빠귀를, 'ovo'는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코소보'는 '검은지빠귀가 사는 곳', 즉 '검은새들의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과 세르비아 군대가 맞붙은 대결로, 대부분의 세르비아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입니다. 이 날짜는 세르비아의 독립이 약 5세기 동안 사실상 끝나고 오스만 지배 아래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르비아인들이 군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참전한 세력은 세르비아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이전의 정치적 상황
오스만의 세력은 1346년 발칸반도에 등장한 이후 꾸준히 확장되었고, 쇠퇴일로에 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자리를 점차 대체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1371년 9월 26일 마리차 강변에서 벌어진 마리차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 귀족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가 모은 강력한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강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지며, 이 강대한 봉건 영주와 그의 형제는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로 오스만에게 발칸의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 후로 이 지역에서 터키의 위협은 계속 커져갔고, 많은 지역 영주들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비잔티움은 1373년부터 불가리아와 함께 술탄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으나, 그 호소는 실질적인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참 뒤인 1396년에야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1355년에 세상을 떠난 차르 두산이 남긴 중세 세르비아 국가의 핵심 지역은 이제 무라드 1세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고, 오스만 군대의 약탈은 보스니아(1388년)까지 미쳤습니다.
라자르 공작의 국가가 이룩한 경제적·문화적 발전은 오히려 더 많은 터키인들을 세르비아로 끌어모았습니다. 라자르는 이러한 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강대한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라자르의 영토 안에서 세르비아인과 터키인이 처음으로 격돌한 전투는 1381년 파라친 근교 두브라비차에서 일어났으며, 크렙과 비토미르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두브라비차 전투는 기독교 세계 전체가 기념할 만한 승리였습니다. 이후 1386년에는 라자르 본인이 무라드 1세가 직접 이끄는 두 번째 군대를 플로츠니크 근처 톱리차 강에서 요격하여 또다시 터키군을 패퇴시켰고, 당대 세르비아 연대기 작성자는 "무라드가 겁에 질려 도망쳤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에 대한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동남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테살로니키는 긴 포위 끝에 1388년 함락되었고, 세레스는 이미 1383년에 오스만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터키는 발사 2세의 왕국(1385년)과 부카신의 왕국(1371년)이라는 두 개의 세르비아 왕국을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새로 얻은 속국들을 통해 터키는 여전히 상당한 군사적 예비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터키군은 이어서 라자르의 동맹인 보스니아 왕 트르트코 1세를 공격하여 라자르를 약화시키려 했지만, 트르트코의 장군 블랏코 부코비치가 랄라 샤힌이 지휘하는 터키군을 완파하며 오히려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양측의 전력
세르비아 군대는 세르비아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던 두 명의 제후가 함께 지휘했습니다. '차르'라고 불린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세르비아 공작과, 코소보의 영주 부크 브란코비치입니다. 이 세르비아 군대는 보스니아의 트르트코 1세 공작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가 보낸 병력은 라자르 총 병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오스만 군대 역시 구성이 매우 이질적이었습니다. 터키인뿐 아니라 무슬림 및 기독교계 속국 출신 병력까지 섞여 있었고, 오스만 군의 정예 부대인 예니체리도 참전했습니다. 터키 진영의 병력 수가 발칸 연합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연합군은 세르비아 기사단의 정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민요와 서사시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있는데, 밀로시 오빌리치, 톱리차 밀란, 코산치치 이반, 그리고 아홉 아들을 두었던 유그 보그단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모두 전투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터키군의 기동성과 경장 무장은 세르비아 중기병의 위력과 효율성과 맞섰습니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였던 만큼, 세르비아 기사단은 무엇이든 분쇄할 수 있는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의 경과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처절하면서도 판가름이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 첫 단계에서 세르비아 기사단은 터키군의 한 익을 무너뜨렸고, 무라드 1세는 여러 설이 전해지는 상황 속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세르비아 영웅담에 따르면, 밀로시 오빌리치는 전투 전에 술탄을 죽이겠다고 서약한 뒤 그의 천막으로 들어가 부츠에 숨겨둔 단검으로 무라드를 찔러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술탄의 죽음은 오스만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 군대가 붕괴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무라드 1세의 아들 바예지트 1세가 간신히 대패를 막았고, 이 혼란을 틈타 오스만 군 우익을 지휘하던 자신의 형제 야쿠프마저 제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측의 승리 소식은 교황의 감시자들과 트르트코 1세를 통해 서방에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터키군은 곧 재정비하여 연합군에 피로운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라자르와 그의 모든 귀족들은 결국 포로로 잡혀 전장에서 참수당했습니다. 터키군은 전장의 주인이 되었지만, 더 이상 세르비아 깊숙이 진격해 복속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무라드의 죽음과 야쿠프 살해 사건으로 바예지트 1세의 권위가 크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국들의 반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본토로 돌아가 자신의 권력을 다져야 했습니다.
전투의 결과
세르비아는 뚜렷하게 패배했지만, 그 명예는 지켰다고 평가됩니다. 바예지트 1세 역시 완전한 승자는 아니었는데, 그는 라자르의 미망인 밀리차와 신속히 강화를 맺었고, 오스만 군의 서방 진격은 한동안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정복 사업은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한층 강도 높게 재개되었습니다.
사실 이 전투에는 즉각적인 승자가 없었습니다. 터키는 계승 분쟁 상태에 빠졌고, 세르비아는 귀족 계급을 통째로 잃었기 때문입니다. 보스니아 왕이 세르비아가 승리했다고 로마에 보고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어느 쪽도 명백한 승리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세르비아보다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군대를 더 빨리 재건한 터키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반면 세르비아는 다시는 옛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이 전투가 갖는 의미
세르비아인들의 태도를 민족주의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전투의 기억은 그들에게 과거의 영웅적 헌신과 용기를 회고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확인하는 계통이 되기도 합니다(일부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극단적 민족주의 정책을 고취하는 데 이 날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오스만과의 이 전쟁은 세르비아 황금기의 종언이자, 이후 수 세기 동안 유고슬라비아 지역 민족들이 억압과 강제 개종을 겪게 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성 비도브단(성 가이의 날)에 이곳에서 전사한 세르비아인들을 기리기 위해 1953년에 세워진 기념탑은, 그 꼭대기 전망대에서 '검은지빠귀 들판'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전망대에는 각 부대의 위치와 당시 배치된 전술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안내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평원에 흘린 세르비아인의 피가 매년 야생 작약을 피워 올린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꽃은 이 나라에서 매우 드문 식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