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 1805~1894)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실업가로, '수에즈 운하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805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나 1894년 앵드르(Indre) 지방의 라셰네(La Chênaie)에서 세상을 떠났다.
외교관으로서의 초기 경력
레셉스는 1825년 외교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리스본 총영사관 소속으로 근무했다. 1827년에는 프랑스 외무부 상무국 사무실에서 일했고, 1828년 10월 19일 견습 영사로 임명된 직후 튀니지 총영사관에 배치되었다.
1830년에는 클라우젤(Clauzel) 원수가 코스탄틴(Constantine)으로 파견된 임무에 동행해 그를 보좌했다. 1831년부터 1833년까지는 이집트에서 견습 영사로 재직했으며, 1833년 11월 21일 카이로 2등 영사로 승진한 뒤 두 차례에 걸쳐 알렉산드리아 총영사관을 관리했다.
1836년에는 1834~1835년 알렉산드리아를 휩쓴 페스트 유행 당시 보여준 헌신을 인정받아 명예훈장(Légion d'honneur)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가 시리아를 점령하는 동안 현지 기독교인들을 보호했으며, 이집트 부왕과 오스만 술탄 간의 화해에도 크게 기여했다.
유럽 각지에서의 활동
이후 레셉스는 로테르담(1838), 말라가(1839), 바르셀로나(1842)에서 프랑스 영사를 역임했다. 특히 바르셀로나 재직 중 카를리스트 전쟁이 발발하자, 그 도시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의 안전을 위해 탁월한 보호 조치를 취했다. 1848년에는 주 마드리드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입법 의회가 로마 공화국에 대해 취한 적대적 태도에 반대하며 1849년 1월 7일 사임을 요청했다.
수에즈 운하 건설
1854년 10월, 이집트 부왕 무함마드 사이드(Mohammed Saïd)의 초청으로 나일 강변으로 돌아온 레셉스는 수에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 건설 구상을 세웠다. 영국과 튀르키예가 조성한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계획을 끝내 관철시켰다. 은행의 지원 없이 2억 프랑에 달하는 민간 공모 자금으로 추진된 공사는 1859년부터 1869년까지 진행되었다.
1868년 7월 8일에는 사업 완성을 돕기 위해 추첨에 따른 상금과 함께 상환되는 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1869년 11월 20일, 레셉스는 명예훈장 대십자장(Grand Cross)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파나마 운하 사업과 몰락
이집트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언론들이 잘못하여 '수에즈 공작'이라 부르던 레셉스 백작은 중앙아메리카에서도 같은 성공을 거두고자 파나마 운하 굴착에 나섰다. 그는 1881년 3월 23일, 프랑스 소액 저축자들이 맡긴 자본으로 '양양 회사(Compagnie Interocéanique)'를 설립했지만, 이 회사는 결국 파산했고 여기서 유명한 '파나마 스캔들'이 빚어졌다.
이미 의식이 반쯤 흐려진 상태였던 레셉스는 아들 샤를(Charles)과 함께 징역 5년형과 3,000프랑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훗날 파기원(Court of Cassation, 프랑스의 최고 법원)이 공소시효를 이유로 이 형을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