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가 하나의 완전한 질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승인이 필수적입니다. 교황은 이를 허가할 때 수도회 고유의 규칙, 이름, 복장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근거로 삼습니다. 템플 기사단 고유의 규칙 제정이 받아들여진 트루아 종교회의 이후, 규칙 작성 임무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에게 맡겨졌고, 그는 초대 총장 위그 드 팽(Hugues de Payns)이 제출한 안을 바탕으로 성직자 장 미셸(Jean Michel)에게 집필을 의뢰했습니다.
이로써 템플 기사단은 1129년 1월 13일, 회의의 승인과 함께 공식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이후 기사단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새로운 기사단에 대한 찬미(De laude novae militiae)
12세기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인 성 베르나르 덕분에 템플 기사단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혹은 전장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기사들이 기사단에 입단했습니다.
'새로운 기사단 찬미'는 성 베르나르가 위그 드 팽에게 보낸 서한으로, 정식 제목은 '템플 기사들에게 보내는 새로운 기사단 찬미(Liber ad milites Templi de laude novae militiae)'입니다. 이 글은 1129년 다마스커스 공방전에서 프랑크 군대가 패배한 직후에 쓰였습니다.
이 찬미문은 템플 기사단이 뜨거운 열정과 대중의 인정 속에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 문헌에는 템플 기사들이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사는 완전한 안심 속에서 적을 죽이며, 더욱 확실한 믿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가 죽으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요, 죽이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
교황 칙서 '옴네 다툼 옵티뭄'(Omne Datum Optimum, 1139)
'옴네 다툼 옵티뭄'(모든 최상의 선물) 칙서는 1139년 3월 29일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반포했습니다. 당시 템플 기사단은 두 번째 총장 로베르 드 크라옹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칙서는 기사단이 누린 모든 특권의 근간이 된 만큼 지극히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이 칙서에 따라 템플 기사단 형제들은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교황청의 사도적 보호
- 기사단 전속 사제 보유
이후 공동체에는 템플 기사들을 위해 집전하는 '형제 사제(chaplain)'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이 칙서는 템플 기사단이 오직 교황의 권위에만 복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기사단은 세속 성직자들에게 경쟁 상대가 되었고, 후자는 이를 몹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템플 기사단과 주교·사제들 사이에 수많은 이해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칙서가 부여한 특권은 자주 도전받았기에 '옴네 다툼 옵티뭄'은 1154년부터 1194년 사이 무려 열두 차례 재확인되었으며, 이 때문에 원본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교황 칙서 '밀리테스 템플리'(Milites Templi, 1144)
'밀리테스 템플리'(템플의 기사들) 칙서는 1144년 1월 9일 교황 첼레스티노 2세가 반포했습니다. 이 칙서는 템플 기사단의 사제들이 예배가 금지된 지역에서도 "그들의 기사도에 대한 명예와 존경"을 위해 연 1회 예배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다만 파문당한 자의 교회 출입은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는 '옴네 다툼 옵티뭄' 칙서의 재확인에 가까웠습니다.
교황 칙서 '밀리티아 데이'(Militia Dei, 1145)
'밀리티아 데이'(하느님의 기사단) 칙서는 1145년 4월 7일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반포했습니다. 이 칙서는 템플 기사단이 자체 기도소(oratory)를 건립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십일조 징수권과 자체 묘지에 사망자를 안장할 권리를 통해 세속 성직자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사도적 보호는 기사단에 소속된 농민, 가축, 재산 등 모든 자산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한편 템플 기사단은 기사단 묘지에 묻히기를 원하는 이들이 남긴 유증의 3분의 1을 성직자들이 가져간다는 사실을 교황에게 호소했습니다. 이에 따라 '딜렉티 필리(Dilecti filii)' 칙서는 성직자들이 유산의 4분의 1만 받는데 만족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템플 기사단의 복장
템플 기사단의 인정은 규칙과 이름의 확립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사단 고유의 복장 규정이 부여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의 망토는 시토 수도회 수사들의 망토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흰 망토를 입을 수 있는 것은 귀족 출신 기사 형제들뿐이었으며, 이는 육체의 순결과 정절을 상징했습니다. 농민 출신인 하사(sergeant) 형제들은 거친 직물로 짠 망토를 입었지만, 여기에 부정적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장은 기사단이 하사하고, 오직 기사단만이 회수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즉 복장의 소유권은 기사단에 있었습니다. 규정을 중대하게 위반한 형제에 대해서는 회의(chapter)의 재판을 통해 복장 박탈이 선고되었으며, 이는 기사단으로부터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 추방을 의미했습니다.
템플 기사단 해체를 선포한 칙서 '복스 인 엑셀소(Vox in excelso)'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상술한 템플 기사단과 그 지위, 복장, 명칭"을 폐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복장이 기사단의 존재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붉은 십자가
붉은 십자가는 템플 기사단에게 다소 늦은 1147년에야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보입니다. 교황은 심장이 있는 왼쪽 어깨에 십자가를 달도록 허락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사단의 규칙이나 그 개정본에는 이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교황 칙서 '옴네 다툼 옵티뭄'에는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따라서 템플 기사단이 이미 1139년부터 붉은 십자가를 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템플 십자가의 형태는 한 번도 확정된 적이 없습니다. 기사단 도상학에는 단순한 그리스 십자가, 닻 모양, 꽃 모양 장식, 팔이 넓어진 패터(pattée) 형태 등 다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형태와 무관하게 이 십자가는 기사단원이 기독교 신앙에 속해 있음을 나타냈으며, 붉은색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상기시켰습니다.
주목할 점은 템플 십자가가 위그 드 팽과 그의 전우들이 소속되어 있던 성묘회(Order of the Holy Sepulchre)의 십자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이 붉은 십자가는 네 개의 작은 십자가로 둘러싸인 강력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