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독이 인정한 보팔 나와브의 진술과 케사리 싱 논란
인도 총독(바이스로이)은 보팔 나와브가 전달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를 근거로 옴카르 싱은, 지나(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조드푸르 국왕의 회담 당시 케사리 싱 대령이 마하라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만약 대령이 회담에 동석했더라면 나와브가 그를 언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옴카르 싱에 따르면 케사리 싱이 자신도 그 회담에 참석했다는 허위 인상을 퍼뜨렸고, 바로 이 혼란 때문에 망케카르와 파니카르 등이 사실을 왜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운트배튼의 최종 보고서
1947년 8월 16일,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인무장관에게 최종 보고서를 보냈다. 그중 제41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8월 8일 나는 조드푸르 마하라자를 불렀다. 그는 같은 날 밤 늦게 조드푸르에서 델리에 도착하여 다음 날(8월 9일) 나를 만났다. 마하라자는 망설임 없이 지나를 만난 사실을 인정했으며, 보팔 나와브의 진술이 정확하다는 데 동의했다. 조드푸르 마하라자의 술책을 알게 된 파텔은 마하라자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행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파텔은 마하라자가 방해받지 않고 번왕국에 무기를 수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기근에 시달리는 번왕국 각 지역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라면 인도의 다른 지역을 희생하는 것에도 동의했다. 또한 조드푸르 철도 노선을 커치 번왕국의 항구와 연결하는 데에도 어떠한 장애가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 마하라자는 파텔의 약속에 만족했고, 인도 편에 남기로 결정했다."
옴카르 싱의 해석: 협상 카드로서의 파키스탄 접촉
옴카르 싱은 마하라자 한완트 싱이 파키스탄에 합류하고 싶어한 것도, 라자스탄의 황제가 되고 싶어한 것도 아니며, 사르다르 파텔을 압박해 자신의 번왕국에 최대한의 특혜를 끌어내려 했다고 믿는다.
역사가 달라질 뻔한 순간
독립운동가 프라빈 찬드라 차브라에 따르면, 사르다르 파텔이 조드푸르 마하라자의 체포를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곡울 바이 바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조드푸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지고 있었다. 조드푸르 마하라자가 파키스탄과 결탁하고 있었고, 서신 왕래도 오갔다. 합병 협약 초안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배우들까지 그쪽에서 보내져 왔다.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파텔의 강경 경고와 라지마타의 탄원
사르다르 파텔은 조드푸르 마하라자를 델리로 불러 물었다. "파키스탄과 함께 가고 싶은가?" 마하라자는 겁에 질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파텔은 좀 더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가고 싶으면 너만 보내주마. 하지만 번왕국은 절대 보내주지 않는다." 이렇게 몇마디 꾸중도 섞였다고 한다.
한완트 싱이 사르다르에게 이런 식으로 불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라지마타(대비)는 곡울 바이 바트에게 간청했다. "곡울 바이, 부디 직접 나서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해다오. 너희는 나라, 인도와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 아들이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잊어버리자. 사르다르 님께 우리 아들에게 그토록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전해다오." 라지마타는 바트지에게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 일을 도와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결국 조드푸르 마하라자는 동의했고, 인도 연방과의 합병 서한에 서명했다.
세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벌어진 음모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조드푸르 국왕은 보팔 나와브와 돌푸르 마하라니의 술책에 휘말려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유리한지 가능성을 타진하러 지나를 찾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도 연방에 합류하는 것이 나은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두 나라 모두와 무관하게 독립적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나은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파텔의 경계심 앞에서 무너진 분리 기도
가네시 프라사드 바르왈은 이렇게 적었다. "조드푸르와 트라반코르의 힌두 왕들은 분리주의적 술책을 시도했지만, 파텔의 경계심 앞에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리야사티' 신문이 폭로한 국왕의 속셈
수마네시 조시는 조드푸르에서 '리야사티'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조드푸르 국왕의 파키스탄 합류 의도를 폭로했다. 1947년 8월 20일자 호에는 '라자푸타나의 봉신들과 보팔 나와브의 계획은 좌절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실렸다. 보도에 따르면, 조드푸르 번왕국의 연방 가입으로 정계가 감격에 젖었지만, 즉위식 연설에서 연방 가입 의사를 밝혔던 새 마하라자가 왜 연방 가입을 주저했는지는 여전히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보팔 나와브의 16개 번왕국 접촉 작전
보팔 나와브는 비행기를 통해 16개 번왕국과 접촉을 시도했다. 조드푸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주변에 번왕국을 파키스탄에 합병시키는 데 찬성하는 봉신들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하라자의 외가 은신처 언론에 게재된 '크샤트리야 비르'의 글이 시사하듯, 파키스탄은 자기르(봉익) 제도에 온정적이었던 반면 인도는 이 제도를 철폐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궁정의 봉신들은 자연스럽게 인도보다 파키스탄을 더 선호했다. 이로 인해 조드푸르 번왕국은 큰 오명을 뒤집어썼다. 인도 연방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음모 과정에서는 스태퍼드 크립스 경이 인도를 방문해 번왕국들과 직접 협의한 뒤, 번왕국이 영국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되리라는 선전도 벌어졌다. 이 이름에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잠 사헵의 거절, 우다이푸르의 강경 답변
파키스탄 측은 다른 이들에게도 독립 유지의 유혹을 던졌다. 조드푸르의 일시적 차질은 이 모든 요소가 집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보팔의 밀서는 잠 사헵에게도 보내졌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조드푸르의 밀서가 우다이푸르 마하라나에게 전해졌을 때, 마하라나는 강경한 답변으로 일축했다. 한편 조드푸르의 연방 가입은 입법의회 로비에서도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