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러시아의 배신 속에 빛난 대승리 – 1770년 아스핀자 전투, 조지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

러시아의 배신 속에 빛난 대승리 – 1770년 아스핀자 전투, 조지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

아스핀자는 현재 약 2,8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조지아 남서부의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1770년, 이곳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진 무대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다시 한번 전쟁 중이었고, 예카테리나 2세(소위 '대제')와 그녀의 참모들은 튀르크에 맞서 새로운 전선을 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두 개의 전선: 그리스와 조지아

한쪽 전선은 그리스였다('오를로프 반란', 즉 '오를로비카'). 러시아는 이 과정에서 그리스 혁명가들을 '팔아넘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다른 전선은 조지아였다. 튀르크와 러시아 모두 조지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조지아에서 튀르크에 도전하기 위해 예카테리나는 에레클레(헤라클레스) 2세 국왕과 합의를 맺고, 독일 출신 장군 고트리프 토틀레벤이 지휘하는 불과 1,200명 규모의 군대를 파견했다.

공성전의 시작과 첫 번째 갈등

러시아군은 에레클레 국왕의 소규모 군대와 합류했고, 1770년 3월 함께 튀르크를 상대로 진격에 나섰다. 4월 14일, 연합군은 튀르크 요새 아츠쿠리를 포위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에레클레는 튀르크가 점령한 조지아 영토의 행정 중심지인 아할치케를 신속히 공략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 출신 장군은 그를 따르거나 지원하기를 거부하고 요새에 병력을 머물게 했다.

러시아의 배신

그 사이 아할치케의 튀르크 총독 골라 파샤는 병력을 규합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골라 파샤는 약 9,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적보다 약 3배 많은 병력을 앞두고 승기를 확신했다. 그는 아츠쿠리의 포위를 풀기 위해 진군했다. 이 소식을 접한 토틀레벤은 포위를 해제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해 조지아인들을 운명에 내버렸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예카테리나의 진짜 목적이, 튀르크가 조지아인을 짓밟는 '더러운 일'을 대신하도록 만든 뒤 러시아가 해방자로 등장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1944년 바르샤바에서 스탈린이 보여준 행보와 흡사하다).

공격적인 컴백

어쨌든 에레클레는 러시아의 배신 소식을 듣고 신속히 후퇴에 나섰다. 튀르크군은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집요하게 추격했다. 그러나 에레클레는 기묘한 역습을 감행했다. 후퇴를 계속하는 대신 반격에 나서 1,500명으로 구성된 튀르크 선봉대를 완파한 것이다. 조지아인들은 포로를 잡지 않았다...

쿠라 강 앞에서 벌어진 결전

그럼에도 튀르크군은 여전히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레클레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튀르크군이 쿠라 강을 건너도록 일부러 내버려 두었고, 4월 20일 저녁 소수의 조지아 분견대가 산간의 눈이 녹아 범람한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를 파괴해 버렸다.

튀르크군은 앞에는 조지아군, 뒤에는 거센 강물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렸다. 새벽이 되자 에레클레는 중앙 부대를 직접 이끌고 적진에 돌진했다. 소수의 조지아 병사들은 튀르크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수많은 병사가 쓰러졌다.

기적 같은 승리

한때 튀르크군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다. 그러나 에레클레와 그의 장군들 — 기오르기 바토니슈빌리와 다비드 오르벨리아니 — 의 용기, 그리고 병사들의 필사적인 투지가 기적을 만들어냈다. 튀르크군은 패배해 사방으로 도주했다. 골라 파샤는 전사했고, 그의 병력 약 3,000명이 전사하거나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 놀라운 승리였다.

러시아의 배신 속에 빛난 대승리 – 1770년 아스핀자 전투, 조지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러시아의 배신 속에 빛난 대승리 – 1770년 아스핀자 전투, 조지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

에레클레 2세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