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르완다 대량학살: 100일간의 지옥, 후투와 투치의 비극

르완다 대량학살의 배경

르완다와 부룬디는 아프리카 중부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나라로, 프랑스의 브타뉴 지방보다 면적이 좁지만 비옥한 토지 덕분에 인구는 두 배에 달한다. 식민지배 이전에는 서로 다른 카스트가 한곳에서 공존했지만, 엄밀히 말해 서로 다른 민족은 아니었다. 이들 카스트의 구분은 주로 생업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투치족은 목축업을, 후투족은 농업을 담당했다.

1924년 벨기에가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투치족을 둘러싼 '신화'가 만들어졌다. 식민지배자들은 투치족을 후투족보다 우월한 존재로 규정했고, 벨기에는 이를 근거로 투치족을 통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1959년 르완다에서 쌓여온 긴장이 결국 후투 혁명으로 폭발했다. 이 혁명으로 약 1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투치족의 지배 체제는 막을 내렸다.

1972년 부룬디에서도 후투족이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약 10만 명의 후투족이 학살당했고, 투치족은 권력을 유지했다.

그다음 해인 1973년, 르완다에서는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장군의 쿠데타로 후투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정권은 투치 귀족 일부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수장 폴 카가메는 주로 투치족 출신 병사들을 이끌고 우간다에서 르완다로 진격해 권력 탈환을 시도했다. 수도 키갈리의 하비아리마나는 위기감을 느꼈고, 같은 시기 프랑스가 분쟁에 개입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파견한 낙하산 부대가 잠시 질서를 회복하는 동안, 하비아리마나는 마을마다 후투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회적 긴장은 4년간 계속 고조되었다.

프랑스의 압력 속에 1993년 8월 4일 아루샤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권력 분점을 통해 평화를 회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결국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1994년 당시 르완다 인구에서 투치족은 14%, 후투족은 85%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4년 4월~7월

르완다 대량학살: 100일간의 지옥, 후투와 투치의 비극

주요 인물

  •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 폴 카가메
  • 프랑수아 미테랑

전개 과정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전용기가 격추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비아리마나 세력에 속한 후투족들은 마체테를 들고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했다.

국가 전체가 극도로 잔혹한 내전에 빠져들어 아무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카스트' 자체가 주로 식민지배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후투족이고 누가 투치족인지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웠고,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뒤덮었다.

르완다 정부군(FAR)과 르완다 애국전선(RPF) 간의 전투가 국토 전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프랑스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 인도적 목적의 군사 작전인 '터콰즈 작전(Operation Turquoise)'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 국경 지대에 조성된 안전 인도주의 구역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인도주의 구역 안에서조차 학살이 계속되면서 프랑스의 개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94년 7월 4일, 폴 카가메가 이끄는 RPF가 수도 키갈리를 장악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후 후투족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후투족이 자이레로 피신했다.

결과

  • 후투족과 투치족을 합쳐 약 80만~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유엔이 공식 인정한 단 세 건의 집단살해 중 하나로, 그 참상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 폴 카가메가 르완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국가는 다시 투치족의 지배 아래 놓였다. 카가메 정권은 영연방(Commonwealth)에 가입하고 '프랑스아프리크(Françafrique)' 노선에서 벗어나며 프랑스와의 거리를 두었다.
  • 동맹 관계의 재편과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인해 르완다를 포함한 중앙아프리카 전역이 크게 불안정해졌다. 자이레로 피난한 후투 무장세력은 이후 제1차 콩고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