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미국의 압력과 일본의 위협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영국 정부는 인도 문제를 해결하라는 국제적 압력을 점점 더 세게 받기 시작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영국 정부에 강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과 경제 안정이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미국 정부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42년 3월, 일본 제국군은 인도 국경 인근까지 진격해 언제든 침공을 개시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습니다. 이 공격의 목표는 인도 자체가 아니라 인도에 주둔한 영국 세력이었습니다. 영국은 인도인들 자신의 협조 없이는 일본군을 상대로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렇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수상 윈스턴 처칠은 태세를 전환해 유연한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처칠의 하원 연설과 크립스 선교단 파견
1942년 3월 11일,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하원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전시 내각은 인도인들의 희망에 따라 영국 정부가 추진할 개혁에 대한 인도인들의 두려움과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스태퍼드 크립스 경을 인도에 파견합니다. 크립스 경은 왕실 정부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며, 그가 지참하는 제안은 온전히 수용되거나 완전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크립스 선교단의 인도 도착
크립스는 1942년 3월 22일 델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진보적·사회주의 성향의 정치가로 인도인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었지만, 왕과 군주제에 대해서는 호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선교 활동에서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의 준비는 오직 인도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을 상대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고, 인도에서 이 두 세력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될 번왕국(토번)의 번왕들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번왕 측의 목소리가 거의 반영되지 않으면서 크립스 선교단은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크립스는 인도에서 국민회의, 무슬림 연맹 등 여러 정당과 회담을 진행하며, 인도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과 영국이 내줄 준비가 된 것 사이의 차이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V. B. 쿨카르니는 저술에서 “크립스는 인도의 친구이자 후원자로 여겨졌다”고 기록했습니다.
번왕들과의 회담: 3월 28일
1942년 3월 28일, 크립스는 번왕 회의(나렌드라 만달) 대표단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크립스는 번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도 연합이 성립될 경우, 각 번왕국의 관계는 영국 왕실이 아니라 독립된 실체인 인도 연합과 맺어지게 됩니다. 단, 기존 조약은 해당 번왕국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조약 종료를 원하지 않는 한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러나 번왕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국민회의의 손에 맡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독립 이후에도 자신들의 번왕국을 과거 동인도회사가 체결한 조약의 범위 안에서 영국 왕실 아래에 두고자 했습니다.
3월 29일 기자회견: 제안서 초안 발표
1942년 3월 29일, 크립스는 기자회견을 통해 각 세력 간 합의를 위한 계획 초안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인도 연합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새 헌법이 제정됩니다. 이를 위해 제헌의회가 구성되며, 영국령 주와 번왕국 모두가 제헌의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됩니다. 영국령 인도의 어느 주라도 새 헌법을 수용하지 않으면 기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인도 연합과 대등한 지위가 부여됩니다. 제헌의회는 각 주 입법의회 하원을 비례대표제로 구성하며, 이를 위해 새로운 선거가 실시됩니다. 모든 하원 의석수만큼 제헌의회 의원이 선출됩니다. 인도 번왕국은 인구 비례에 따라 대표를 제헌의회에 파견하도록 초청되며, 번왕국 대표의 권한은 영국령 인도 대표와 동일합니다. 번왕국은 새 헌법을 수용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갖습니다. 제헌의회 의원은 총 207명으로, 이 중 158명은 영국령 인도 출신, 49명은 번왕국 출신입니다.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황제 정부가 인도의 세계대전 수행의 일환으로서 인도 방위의 책임을 직접 맡지만, 군대·인력·물자 제공의 책임은 인도 정부 및 인도 시민과의 협력 아래 인도 국민에게 있습니다. 정부는 인도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각 평의회, 영연방, 국제연합에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협의에 참여하여, 인도의 독립을 위해 필요하고 필수적인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협력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획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크립스는 말했습니다.
“인도 연합 창설을 위한 노력은 즉각 시작됩니다. 전쟁 종료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각 정당 간 합의가 이루어지는 대로 주(州) 선거가 실시되고, 선거 결과가 나오는 즉시 제헌의회가 구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에 어떤 것도, 심지어 시한까지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기자: “영국이 약속을 번복해 온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 제안들을 보증하게 할 수 있습니까?”
크립스: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그 어떤 보장도 소용이 없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으실 겁니다.”
기자: “이 결의안에는 번왕국 주민들의 제헌의회 참여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요.”
크립스: “해당 번왕국에 선거 방식이 있다면 그것을 활용하겠지만, 선출된 기구가 없는 번왕국의 경우 지명된 대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자: “번왕국들이 인도 연합에 가입하려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크립스: “번왕국들에게 직접 묻겠습니다.”
기자: “번왕국의 주민들에게는 어떤 발언권이라도 있습니까?”
크립스: “그것은 해당 번왕국의 현 정부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새 정부를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 정부와 번왕국의 관계는 조약을 통해 맺어져 있으며, 그 조약은 번왕국이 변경을 원한다고 밝힐 때까지 유지됩니다. 인도 번왕국이 연합에 가입하더라도 그 지위는 오늘날과 정확히 같을 것입니다.”
기자: “특정 주나 번왕국이 참여를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우됩니까?”
크립스: “그들은 일본, 샴(태국), 중국, 버마 같은 다른 국가들을 대하듯 그런 주들을 대우할 것입니다.”
선교단의 결말과 역사적 의미
크립스 선교단의 제안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인도 국민회의는 ‘현 지위 유지’ 조항을 국가 분열의 씨앗으로 보아 거부했고, 무슬림 연맹 역시 제안된 자치권의 범위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번왕국들의 반발까지 겹치면서 선교단은 1942년 4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이 선교단은 영국이 처음으로 인도에 자치령(domionion) 지위와 제헌의회 구성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 골자는 이후 1947년 인도 독립의 토대가 되는 개념들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