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마가다가 강성해지던 시절. 인도의 먼 서쪽에서 기묘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입니다.
그는 중동의 거대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 북서부까지 진격했습니다.
그 결과 인도에는 수많은 그리스계 세력이 생겨났고, 이 혼란 속에서 고대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가 탄생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그 마우리아 왕조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마우리아 왕조 이전, 난다 왕조
마우리아 왕조는 혼란스럽던 인도를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한 왕조입니다. 다만 마우리아 왕조는 앞선 글에서 다룬 마가다에서 일어난 왕조입니다. 마우리아 이전의 마가다는 난다 왕조라는 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난다 왕조는 기원전 4세기경에 성립한 인도 북부의 왕조로, 바르나 제도에서 최하위인 노예 계급 수드라 출신의 마하파드마(그리고 바르나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않은 불가촉천민 일부)가 세운 나라입니다.
* 수드라에 대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마하파드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왕조를 무찌르고 집권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르나 제도 하에서 하층민 출신이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왕·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를 타도하고 세운 실력 중심의 왕조였습니다. 철광석과 삼림 자원,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그 난다 왕조를 멸망시킨 사람이 찬드라굽타입니다.
브라만 문헌에서는 그가 최하위 카스트인 수드라 출신이라 하고, 불교 문헌에서는 왕·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 출신이라 전하여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합니다. 당시 비주류였던 불교를 보호한 까닭에 브라만교 측에서는 왕으로서의 평가를 외면당했다고 합니다.
반면 전왕조인 난다 왕조는 최하위 카스트 출신의 왕조였기 때문에, 카스트 정점에 선 브라만들이 찬드라굽타에게 지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실히 난다 왕조에 의한 기득권 지배는 브라만들에게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브라만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전해지는 찬드라굽타는 기원전 317년경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마우리아 왕조를 건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어떤 왕조였을까?
마가다의 난다 왕조 뒤를 이어 성립한 마우리아 왕조는 한자로 번역하면 '공작(孔雀) 왕조'라고도 부릅니다. 시조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조의 유산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그리스 세력을 인더스 강 유역에서 몰아냈습니다.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에 걸친 국가가 세워진 것은 인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우리아 왕조의 서쪽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가 상당히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셀레우코스 왕조). 이 셀레우코스 왕조가 인더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굽타와 접촉하게 되었고, 찬드라굽타는 이를 물리쳤습니다.
다만 이 무렵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된 데다 기록이 적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셀레우코스 1세가 침공하여 찬드라굽타가 이끄는 대군과 실제로 충돌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군사적 충돌 여부조차 불확실하며 전투 없이 평화 조약을 맺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전투 없이 평화 조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군사적 충돌 끝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텐데, 왜 전투 없이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는 설이 나온 걸까요? 그 배경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잠깐 퀴즈입니다. 고대 인도 시대의 '현대식 전차(탱크)'에 해당하는 무기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우선 고대의 전차(戰車)가 있지만, 전차보다 더 공격적인 돌파형 무기가 있습니다. 힌트는 '인도'와 '아프리카'입니다. 답은 뒤에서 공개하겠습니다.
마우리아와 셀레우코스의 접촉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혼란기였다
시간을 셀레우코스가 나라를 세우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례없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후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대왕의 죽음은 아이가 태어날 무렵,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위대한 왕으로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지만, 사실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죽기 직전 "후계자는 가장 강한 자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의 통치에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대왕의 죽음과 함께,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유지·계승하려는 파벌과 셀레우코스 1세를 포함해 스스로 영토를 장악하려는 파벌이 대립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기원전 323년부터 시작된 소위 디아도코이 전쟁입니다.
디아도코이(후계자)들을 둘러싼 전쟁에서 사용된 매우 공격적인 무기가 바로 정답 '전투 코끼리'입니다. 지중해 연안, 특히 북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아마도 숲코끼리의 일종)가 전투 코끼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사람' 대 '코끼리', '말' 대 '코끼리'의 결과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셀레우코스 측은 지중해 연안의 전투 코끼리에 대항할 방책으로 인도산 코끼리를 확보하기 위해 마우리아와 접촉하여 영토를 인정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마우리아 입장에서도 영토가 늘어나는 일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실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마우리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국경 지대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고,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와 쇠퇴
위대한 시조 찬드라굽타의 뒤를 아들이 이었고, 이후 손자 아소카 대(재위 기원전 268년~232년)의 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합니다. 인도 아대륙 동쪽의 칼링가를 정복하며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아소카 왕은 정복 과정에서 겪은 막대한 사상자를 뉘우치며 점차 불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무력에 의한 정복 활동을 접고 법과 사회 윤리(=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추구합니다.
칙령을 반포하여 다르마에 따른 평화로운 사회 건설과 통치를 추진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편찬과 각지로의 포교 활동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에는 막대한 재정 지출이 따르기 마련이었고, 관료제와 군대를 유지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인도에서 비주류였던 불교에 대한 신앙이 커지면서 왕실에 대한 브라만 계급의 반발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아소카 왕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아소카 왕에게는 많은 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열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쇠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쇠퇴를 틈탄 것은 박트리아의 그리스 세력이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의 일입니다. 게다가 이란계 유목민의 침입, 다시 박트리아에서 쿠샨족의 진출이 이어지면서 마우리아 왕조의 세력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180년경, 마우리아의 장군 푸샤미트라가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인 숭가 왕조를 세우며 마우리아 왕조는 막을 내립니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할 무렵, 인더스 강 유역은 그리스·이란계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데칸 고원을 포함한 인도 아대륙 남부는 사타바하나 왕조가 지배하게 됩니다. 북인도는 다음 통일 왕조가 떠오르기까지 긴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