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귀족 페르디난드 드 마젤란(Ferdinand de Magellan)은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귀화했습니다. 그는 젊은 국왕 카를로스 5세에게 위대한 계획을 제안했는데, 바로 인류 최초로 지구 전체를 일주하여 그 크기를 측정하고 정확한 해도를 작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지구의 정확한 크기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스페인 왕실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에 따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범위를 확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출항을 위해 다섯 척의 배가 용선되었고, 선원 237명과 2년 치 식량이 준비되었습니다. 마젤란과 선장들은 이 항해에서 얻을 미래 수익의 일부를 보장받았지만, 이 원정은 결국 극적으로 변해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항해 기간
1519년 8월 ~ 1522년 9월
주요 인물
페르디난드 마젤란 · 카를로스 5세 · 말라카의 엔리케
항해 경과
함대는 1519년 8월 세비야를 출발하여 브라질에 기항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무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조짐을 보였는데, 모든 선장이 마젤란의 구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함대는 남쪽으로 항해하여 12월에 파타고니아에 정박했습니다. 이듬해인 1520년 3월,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고, 일부 선장들이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5월에는 한 척의 배가 좌초되었습니다. 나머지 네 척은 대륙을 우회하는 통로를 찾아 남하했고, 마침내 마젤란 해협을 발견했습니다. 이 험한 해협을 통과하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습니다. 항해 도중 한 배가 반란을 일으켜 세비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젤란은 최초로 태평양을 건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횡단 항해는 여섯 달에 걸쳐 극악의 조건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물과 식량이 고갈된 승무원들은 가죽을 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습니다.
1521년 3월, 원정대는 마침내 필리핀에 도달했습니다. 마젤란은 이 땅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평화롭게 환영해준 원주민들 사이에서 출발 당시 찾던 귀중한 향신료를 발견하게 됩니다.
항해자들은 세부 섬을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막탄 섬은 복속을 거부했습니다. 마젤란은 직접 원주민들과의 전투를 이끌었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것은 패배였습니다.
마젤란의 유언에 따르면, 그의 노예이자 오른팔이었던 말라카의 엔리케는 자유민으로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원정대 지휘관이 유언의 집행을 거부하자, 엔리케는 세부의 후마본(Humabon) 왕과 손잡고 스페인 선원들을 배반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매복 공격 끝에, 살아남은 스페인인들은 남은 세 척 중 한 척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7월에 보르네오에 도착했고, 1521년 11월에는 몰루카 제도(향료 제도)에 닿았습니다. 손상된 배 한 척을 포기한 뒤 나머지 승무원들은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빅토리아호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넘은 유일한 배가 되었고, 마침내 최초의 세계일주를 완수했습니다. 1522년 9월, 그 배는 스페인에 도착했습니다.
결과와 의의
- 이 원정은 스페인에 막대한 비용을 안겼지만, 덕분에 스페인은 1565년 필리핀을 영유할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 세계일주를 통해 마젤란 해협을 실용적 항로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물론 일반적으로는 파나마를 경유하는 길이 선호됨), 지구에 대한 더 정확한 측정값도 확보되었습니다.
- 나아가 풍부한 자원을 지닌 태평양 탐험의 서막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