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은 '잉글랜드 내전'이라고도 불리며, 17세기 잉글랜드의 권력 분배와 통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청교도 혁명과 이후의 명예혁명은 잉글랜드의 정부 형태를 절대군주제에서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 국가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배경
청교도 혁명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산물이자, 급속한 상업 발전을 이룬 부르주아와 향촌 지주 계층인 젠트리(gentry)의 요구가 결합된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군주제와 '왕권신수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왕권신수설이란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므로 왕이 백성을 다스릴 정당성을 지닌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청교도 혁명은 종교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봉기였으며, 의회파, 왕당파, 그리고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교파 대표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전쟁이었습니다.
원인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절대군주의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불만의 씨앗은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서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싹텄습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그녀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스튜어트 왕, 즉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아들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생전에 일부 백성들은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1542~1587)가 왕위에 오르기를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엘리자베스 암살 모의 혐의로 잉글랜드에 감금되어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결국 1587년 2월 8일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을 승인했습니다.
왕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 외에도, 여왕은 귀족 계층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잉글랜드 방어에 더 이상 귀족의 군사적 역할이 필수적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귀족들은 정치 무대에서도 입지를 잃어갔고, 하원은 의회 안에서 상원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젠트리는 의회 발언권을 요구했으며, 가톨릭 교회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소부르주아지는 청교도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확립한 성공회가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너무 가깝고, 예식에서 가톨릭풍 의례를 강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어떠한 변화도 수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훗날 내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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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신수설
스코틀랜드 출신 칼뱅주의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신수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그는 군주제가 신이 정한 제도임을 논증한 저술을 여러 편 남겼고, 왕은 지상에서 신의 뜻을 실현할 책임을 지니며 법 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604년 왕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의회와 충돌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성공회 개혁, 즉 가톨릭색 짙은 의례의 제거를 요구했고, 동시에 소부르주아지는 더 큰 정치적 발언권을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왕은 태도를 강경하게 굽혔고, 의회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신적 통치 권리를 재확인했습니다.
이에 헌법학자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는 '왕은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다'며 왕에게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수정을 가하지 않은 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지만, 죽기 전 청교도들에게 추방을 경고했고, 1620년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이주한 순례자들입니다.
제임스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1세(1600~1649)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가톨릭을 경멸하면서도 정작 청교도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더 깊은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찰스 1세의 통치는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1592~1628)를 수석 고문으로 기용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의회는 그의 정책, 특히 30년 전쟁에 대한 추가 물자와 병력 파견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결국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강제 차입금을 걷었으나, 극심한 재정난 끝에 의회를 다시 소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28년 열린 회의에서 왕은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이라 불리는 문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군주는 다음을 서약했습니다.
- 신민의 권리를 존중할 것
- 군대의 민가 강제 숙영을 중단할 것
- 불법 과세와 자의적 체포를 금지할 것
종교 자유에 대한 탄압
1629년 왕은 통치에 직접 간섭하는 추가 결의안들과 마주했습니다.
그해 의회는 두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첫 번째 결의는 종교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자, 곧 가톨릭에 우호적인 자를 왕국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었고,
두 번째 결의는 의회의 동의 없이 관세 징수를 명령하는 자 역시 왕국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고, 의회는 이후 11년간 소집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권리와 내전의 발발
왕의 전횡에 맞서 청교도들은 마그나 카르타와 모든 잉글랜드 신민의 권리를 내걸고 항거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왕권신수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이 이론은 법에 대한 모든 소구를 무력화하고 재산권과 신체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잉글랜드 부르주아지는 왕의 통치 특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은 1640년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의회를 소집하자, 의회는 오히려 고위위원회(High Commission) 문제 등을 들어 반격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왕은 의회와 싸우기 위한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군대의 첫 움직임은 1641년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지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촉발되었고, 이후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며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644년 하원에서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주창으로 새로운 군 편제, 이른바 새모델군(New Model Army)이 등장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의 최후

찰스 1세의 처형은 청교도 혁명의 종막을 장식했습니다. 화가: 제임스 위숩(James Weesop)
크롬웰은 젠트리 출신으로 신사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1640년부터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계급 구분이 사회의 기둥이라고 믿었으며, 청교도들이 내세운 평등주의에는 반대했습니다.
크롬웰이 찰스 1세와 갈등을 빚은 지점은 국민에 대한 과세, 재산권의 불안정, 그리고 종교 자유의 부재였습니다.
그는 왕권신수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신이 자신을 선택하여 백성을 이끌고 찰스 1세에 맞서게 했다고 진심으로 확신했습니다.
1649년 1월 1일, 찰스 1세는 '잉글랜드 공화국의 폭군, 배신자, 살인자이자 공적이고 불굴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은 사실상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135명의 판사 중 절반만이 참석했으며, 크롬웰을 지지하는 인사들만이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왕은 신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책임을 진다'는 명분 아래 크롬웰이 재판을 주도했고, 찰스 1세는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결과와 의의
찰스 1세의 죽음과 함께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잉글랜드에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의회가 해산된 뒤 1653년 크롬웰은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칭호로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 시기는 공화정(Commonwealth)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아들 리처드가 뒤를 이었지만, 아버지에 비해 지도력이 크게 미달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내부 분열 속에 곧 물러났습니다.
1660년 의회는 군주제 복원을 결정했고, 찰스 2세(1630~1685)가 네덜란드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고 잉글랜드는 '왕정복고(Restoration)'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의회와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의 합의에 따라 의회군주제, 즉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고, 이는 근대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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