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해상 패권의 시작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사 원정은 이 두 나라를 강력한 해상 함대를 갖춘 최초의 유럽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원정과 신대륙의 발견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탐사 항해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이동하며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몰락과 발야돌리드 논쟁
그러나 당국은 처음에는 주로 현지 거주 인구를 동원했습니다. 페루인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커피, 차, 초콜릿, 설탕, 담배 등을 재배하는 데 투입되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본토의 귀족과 지배 계층 사이에서 빠르게 유행하며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유럽에서 유래된 질병이라는 '미생물 충격'에 시달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1550년의 발야돌리드 논쟁을 계기로 원주민에 대한 처우가 완화될 수 있었습니다.
15세기~19세기
삼각무역의 진행 방식
이후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습니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가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초기 대서양 횡단 무역을 통해 수백만 명의 노예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노예 무역이 진정으로 조직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18세기와 19세기 사이로, 이 시기 '삼각무역'이 그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노예상들은 유럽 열강의 항구를 출발해 아프리카 연안으로 향하고, 무역 거점(상관)에서 노예를 싣고 기아나, 앤틸리스 제도, 아메리카 등의 식민지로 이동합니다. 노예들이 판매된 후 배는 물자를 가득 실은 채 본국으로 돌아가는 구조였습니다.
비참한 항해 조건
플랜테이션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노예 무역은 매우 성행했습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간 노예의 수는 약 8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항해 조건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배들은 최대치까지 짐을 실었고, 노예들은 수개월에 걸친 항해 내내 좁은 선창에 빽빽하게 쌓인 채 사슬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과밀 수용으로 인한 참혹한 위생 상태 속에서 약 200만 명의 노예가 바다 위에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플랜테이션 노동 역시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감시와 가혹한 처벌에 시달려야 했고, 과중한 노동 부담 때문에 도망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노예 무역의 결과
- 노예 무역은 무엇보다 아프리카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가 될 사람들은 마을 약탈과 습격 과정에서 선별되었습니다. 또한 노예 무역에 대한 반발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내부에서도 유럽인과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한 아프리카인들에게 인구들이 때로는 폭력적으로 저항했습니다.
-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일어난 노예 봉기는 결국 해방에 대한 사회적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목소리는 날로 커졌고, 이후 영국이 1807년 노예 무역을, 1833년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는 등 여러 나라에서 단계적으로 노예제 철폐가 현실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