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위기와 전쟁을 이끈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위기와 전쟁을 이끈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932년경 빈첸초 라비오사가 촬영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 위키미디어 커먼스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1932년, 1936년, 1940년, 1944년 네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1951년 발효된 헌법 수정 제22조가 후임 대통령의 임기를 두 번으로 제한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 취임부터 임기 중 서거에 이르기까지 루즈벨트는 한 세대의 미국인들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통해 이끌었다. 그는 오늘날까지 그 뒤로 선출된 모든 대통령들이 본받고자 하는 모범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일부 대통령들은 그의 사회·경제·정치적 유산을 부정하기 위해 그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권 속의 유년기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뉴욕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특권적인 유년기를 보냈으며 저명한 학교에서 수학했다. 몇 년간 변호사로 일했지만 그의 진정한 소명은 정치였고,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었는데, 이는 공화당 소속으로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먼 친척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달랐다. 그럼에도 프랭클린은 시어도어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겼으며, 1905년에는 그의 조카딸 엘리너와 결혼했다.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윌슨은 루즈벨트를 해군차관보로 임명했다. 이 직책 덕분에 그는 1917년 4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20년 대선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주당은 참패했다. 하지만 40세가 채 되지 않은 루즈벨트는 앞날이 창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921년 8월, 그는 갑작스럽게 하반신 마비를 겪는다. 의사들은 소아마비로 진단했고,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목발이나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노력 끝에 그는 정치 무대로 돌아왔고, 점차 리더십을 드러내던 아내 엘리너의 도움을 받았다. 1928년에는 뉴욕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929년 10월 주식 시장 폭락 당시 루즈벨트는 동시대 사람들 대부분만큼 예리하지 못했다. 그는 보좌관에게 "작은 파문"에 불과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대공황은 몇 달 만에 전 세계로 번졌다. 과잉생산 위기로 오래 고통받아 온 미국 농업 위에 산업 생산이 붕괴하고 은행 파산이 잇달았으며, 대량 실업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갔다. 1928년에 선출된 공화당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경제를 되살리지 못했다.

모든 것을 바꾼 백일

위기의 타격이 가장 컸던 주 중 하나를 이끌며 루즈벨트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긴급 조치를 단행했다. 1932년 7월 초, 치열한 경쟁 끝에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 자리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미국 국민을 위한 새로운 딜(New Deal)"을 약속했다. 언론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고 명명한 전문가 그룹을 곁에 둔 후보는 의욕에 넘치면서도 때로는 모순되는 연설들을 이어갔다. 1932년 11월 8일, 그는 후버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루즈벨트가 1933년 3월 4일 취임 선서를 할 때 경제 위기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는 울림 있는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할 것을 호소했다. 즉시 신뢰를 회복시키는 긴급 조치들을 내놓았고, 그의 참모 레이먼드 몰리는 "자본주의가 8일 만에 구원받았다"라고 말했다. 이후 100일 동안 행정부와 의회는 협력하여 농업, 공공사업, 긴급 사회부조, 산업 조직, 금융 규제 등 여러 분야에서 인상적인 개혁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대통령은 라디오 '노변 담화(fireside chats)'를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개척했다.

연방대법원이 위헌을 이유로 뉴딜의 상징적 개혁 여럿을 무효화했지만, 그 추세를 꺾지는 못했다. '100일' 개혁과 대통령이 1월에 단행한 달러 평가절하의 합작 효과로 경제 활동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1935년 통과된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은 뉴딜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성과로, 실업보험과 노령연금의 토대를 마련했다. 사회보호 체계는 1960년대에야 세 번째 기둥인 건강보험으로 완성되었는데, 물론 아직도 미완성이다.

루즈벨트가 케인스주의, 즉 국가의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사조로 전환한 것은 1938년 초에 이르러서였다.

1936년 압도적으로 재선된 루즈벨트는 연방대법원과의 불확실한 싸움에 뛰어들고 성급하게 재정 건정성으로 회귀하려 한 탓에 정치적 신뢰의 상당 부분을 낭비했고, 결국 위기가 되돌아오는 결과를 낳았다. 1938년 초에야 그는 케인스주의—창시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따르면 국가의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사조—로 전환하여 적자 지출로 경제 활동을 부양했다. 그의 두 번째 임기에는 또한 연방 기구의 확산을 통해 권한이 확장된 행정부가 재편되었다.

외교 정책 면에서 루즈벨트는 고립주의가 여론의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과 씨름해야 했기에 행동 반경이 좁았다. 그럼에도 일본과 나치 독일이 초래하는 위협을 인식한 그는 평화를 수호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하려 애썼다. 이들 국가의 군수품 주문은 1930년대 후반의 경기 회복에 기여했다. 프랑스 패배의 충격이 깊었던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은 위험에 맞설 가장 유능한 인물로 비쳤다.

끝까지 싸우다

1940년 11월 재선된 후 그는 정치적 수완을 총동원해 여론이 전쟁에 대비하도록 만들고 영국을, 그리고 1941년 6월부터는 소련을 지원했다.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그를 전시 지도자로 만들었다. 연설을 통해 국민의 에너지를 고무시켰고, 때로는 혼란 속에서나마 산업 동원을 조직했으며, 군사·외교적 결정에 온 힘을 실었다. 처칠과 스탈린과 함께 전후 질서와 유엔 창설을 준비한 회담에도 참여했다.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1944년 재선에 성공했다. 죽음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12일 그를 덮쳤다.

루즈벨트 시대가 성공의 연속이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 정책의 우유부단함 외에도, 예컨대 1942년 일계 미국인 강제 수용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고립주의가 아니라 국제적 책임의 행사를 통해 미국의 안보가 더 잘 보장된다는 생각을 미국인들에게 받아들이게 했다. 강력하고 보호적이며 규제하는 연방 국가, 케인스에 입각한 거시경제 정책, 그리고 '빅 비즈니스'(대기업)와 '빅 래버'(대노조)의 협력에 기반한 '전후 합의'의 윤곽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수십 년간 민주당의 이익이 된 지속 가능한 선거 연합을 구축했다.

더 알아보기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브마리 페레옹 지음, Tallandier(Texto), 2015.

1929
10월 주식 시장 폭락 직후, 미국 경제는 대공황에 빠져든다.
1933
루즈벨트 취임 후 100일 동안 의회는 일련의 경제·사회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1935
뉴딜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성과인 「사회보장법」이 미국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1945
얄타 회담 결과를 의회에 보고한 뒤, 루즈벨트는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세상을 떠난다.

필수적 자유
헌법의 정신과 뉴딜의 이상에 따라 루즈벨트는 1941년 1월 국정연설에서 '네 가지 자유'를 언급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화가 노먼 록웰이 그림으로 그린 이 자유들은 세계인권선언의 영감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시리즈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
1/10 - 조지 워싱턴(1732-1799)
2/10 - 토머스 제퍼슨(1743-1826)
3/10 - 앤드류 잭슨(1767-1845)
4/10 -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5/10 -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
6/10 - T. 우드로 윌슨(1856-1924)
8/10 - 해리 트루먼(1884-1972)
9/10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10/10 - 존 F. 케네디(1917-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