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혁명의 국민제헌의회와 1791년 헌법 총정리

프랑스에서 국민제헌의회가 선포된 것은 1789년 7월 9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91년 9월 3일,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종식시키고 프랑스에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헌법이 채택되었다.

1791년 프랑스 헌법의 주요 내용

정부 형태와 통치 체제

군주제는 유지되었지만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부르봉 가문은 계속 왕위를 이었고 루이 16세도 왕좌에 남았다.

국왕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는 권한을 지녔다.

삼권 분립

헌법은 계몽주의가 주장하던 권력 분립 원칙을 제도화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권력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 행정권: 국왕이 행사
  • 입법권: 의원 745명으로 구성된 의회
  • 사법권: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판사

시민적 평등

봉건제가 폐지되고 시민적 평등이 선포되면서 특권 신분과 신분 질서가 사라졌다. 다만 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여전히 유지되었다.

개신교도와 유대인도 시민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선거권 제한(선거 자격 투표)

경제적 기준에 따른 선거 자격 제도가 도입되었다. 시민은 투표권을 가진 '능동적 시민'과 선거에 참여할 수 없는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되었으며, 여성·유대인·해방 노예 등이 후자에 해당했다.

투표권은 25세 이상 남성으로서 1년 이상同一 주소지에 거주하고 3일분 임금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유권자는 국회의원, 지방 의회, 판사, 국민방위대 지휘관, 사제 선출에 참여했다.

반면 피선거권을 얻으려면 50일분 임금에 상당하는 소득이 필요했다.

노동

노동조합과 길드가 해산되었고, 근로자의 결사권과 파업권마저 박탈되었다.

종교

1790년 성직자 문민 헌법(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이 통과되어 사제들은 국가의 관리를 받는 공무원처럼 처우되었고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게 되었다. 아울러 사제들은 헌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고, 종신 서원은 폐지되며 수도회는 해산되었다. 이 일련의 법령은 1791년 제헌의회에서 비준되어 헌법에 편입되었다.

국민제헌의회의 탄생 배경

프랑스 혁명의 국민제헌의회와 1791년 헌법 총정리

국민제헌의회 성립의 출발점은 삼부회 소집이었다. 삼부회는 다음의 세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 제1신분: 성직자 계급으로 약 12만 명의 성직자가 속했다.
  • 제2신분: 귀족 계급으로 궁정귀족, 지방귀족, 법복귀족(귀족 작위를 매입한 부르주아) 등 약 35만 명이었다.
  • 제3신분: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최소 2,400만 명에 이르렀으며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농민 역시 제3신분에 속했지만 이 집단에는 농민 대표가 없었다.

삼부회 소집 과정

루이 16세는 세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자크 튀르고(Jacques Turgot, 1727~1781)를 기용했으나 개혁안은 좌절되었다. 이후 칼론느(Calonne, 1734~1802)가 임무를 이어받아 제1·제2신분으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했다.

재무장관은 두 특권 신분에게 특권을 포기하고 세금을 납부해 프랑스의 재정 파탄을 막자고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의 부채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누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마저 거부되자, 새로 임명된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1804)가 루이 16세를 설득해 세 신분 모두가 참여하는 삼부회를 열게 되었다.

본래 구상은 제3신분이 세금 부담을 떠안는 것이었으나, 더 많은 대표석을 확보한 도시 대중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교착 상태 속에서 1789년 6월 20일, 제1·제2신분 일부의 지지를 받은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프랑스 국민의 진정한 의회'로 선포했다.

루이 16세는 1789년 7월 9일 국민제헌의회 개회를 공식 선포했다. 국왕은 경제 위기, 가뭄으로 인한 곡물 흉작, 미국 독립에 호응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왕의 진짜 목적은 시간을 벌어 군대를 동원해 혁명 세력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물결은 이미 거리로 넘쳐흘렀다. 7월 13일에는 민중 무장 조직인 파리 민병대가 결성되었고,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일어났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프랑스 혁명의 국민제헌의회와 1791년 헌법 총정리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국민제헌의회 의원들은 1789년 8월 4일부터 26일까지 회합하여 봉건적 권리의 폐지와 함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계몽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이 선언은 개인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과 소유권의 불가침, 억압에 대한 저항권을 보장했다. 이 원칙들은 1791년 헌법에 담길 예정이었으나 국왕은 선언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수많은 여성들이 빵 확보, 파리 주둔군 철수, 국왕의 파리 이전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했다. 국왕은 조건을 수용했고, 사실상 혁명가들에 가둔 신세가 되었다.

모든 방면의 압박이 거세지자 국왕은 가족과 함께 도피를 시도했으나 바렌(Varennes)에서 발각되어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끌려돌아왔다.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

  • 1791년 헌법은 프랑스 전역의 도량형 통일을 추진했는데, 지역마다 고유한 측정 단위를 쓰던 농민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일으켰다.
  • 성직자 문민 헌법은 국민과 종교계를 분열시켰다. 새 정부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헌법에 서약한 사제들은 '헌법 사제(서약 사제)'로 불렸지만, 상당수 신자들에게 외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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