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는 포르투갈의 변호사이자 대학 교수로, 1933년부터 1968년까지 각료평의회 의장(총리)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살라자르는 권위주의 체제인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신국가)'를 확립하고, 그 이념적 기반인 '살라자리즘(Salazarismo)'을 정착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생애
살라자르는 1889년 4월 28일 비미에이루(Vimieiro)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업을 도왔던 인물로, 그는 이러한 농촌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그는 비제우(Viseu) 신학교에 들어가 약 8년간 수학했지만, 결국 종교적인 삶 대신 세속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합니다.
학업과 학문적 배경
이후 그는 코임브라(Coimbra)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했고, 기독교 민주주의 학술 센터에 가입했습니다. 그의 사상적 토대는 교황 레오 13세(1810~1903)의 교회 사회교리 관련 회칙과 프랑스 사상가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1868~1952)의 저작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살라자르는 가톨릭 신문에 수많은 글을 기고하고 강연 활동을 펼치며, 가톨릭 신자도 공화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왕당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동시에 그는 타락한 제도라고 여긴 사회주의와 의회주의를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는 코임브라 대학교 경제학 교수 임용 시험에 합격했고, 포르투갈 경제 상황에 대한 일련의 논문 발표로 정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정치 경력의 시작
살라자르의 본격적인 정치 경력은 1921년 가톨릭 정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시작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단 한 번의 국회 회의에만 참석한 뒤 사흘 만에 코임브라로 돌아갔습니다.
경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저술 덕분에 1926년 재무부 장관으로 초빙되었지만, 자신이 요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자 겨우 5일 만에 사임합니다.
그러다 1928년 오스카르 카르모나(Oscar Carmona, 1869~1951)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다시 장관직에 복귀하며 '슈퍼 장관'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살라자르는 모든 부처의 예산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습니다.
1930년에는 자신의 정당인 국민연합(União Nacional)을 창당했으며, 이 정당은 그의 집권 기간 내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정당이 되었습니다.
정부 내 입지를 굳힌 그는 식민지부 장관 등 여러 직책을 겸임하며 군부와 문관 정부를 혼합한 정치 노선을 제시하며 점차 지지 기반을 넓혀갔습니다. 한편으로는 군주제 복원 논의에서 거리를 두면서 보수·왕정 우파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습니다.
각료평의회 의장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상은 계속 높아졌고, 마침내 1933년 헌법 승인에 성공합니다. 이 헌법은 각료평의회 의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으며, 살라자르는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이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19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여전히 포르투갈을 통치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통치는 정치적·시민적 자유의 부재, 식민지 정책의 고수, 서방 진영과의 협력, 그리고 스페인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살라자르 체제는 수백만 명의 포르투갈인 해외 이민을 낳았으며,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정치 체제와 통치 방식
살라자르 정권은 권위주의, 반의회주의, 반자유주의, 반공산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삼았으며, 파시즘과 사회 가톨릭주의가 혼합된 성격을 지녔습니다.
정부는 1933년 헌법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와 법인의회(Corporate Chamber)로 구성된 양원제였습니다. 파업권과 정당 창설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대통령은 군 출신 인사가 국민 선거로 선출되었고, 대통령이 각료평의회 의장을 임명하는 구조였습니다. 이 자리는 사실상 줄곧 살라자르가 차지했습니다.
특히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하나의 정당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아니라, 창시자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개인 독재 체제였다는 점에서 '살라자리즘'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936년 5월 28일 브라가(Braga)에서 행한 유명 연설에서 살라자르는 자신 정권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가정을 존중하는 것."
시민권과 언론 통제
에스타두 노부 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결사의 자유와 노조 활동이 금지되었고, 언론 검열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1933년에는 국민 감시를 목적으로 하는 감시 및 국가방위경찰(PVDE)이 창설되었고, 1945년에는 명칭이 바뀌어 국제국가방위경찰(PIDE)이 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최대 6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었고, 영장 없이 가택 수색을 집행하며 피구금자와 외부의 접촉을 차단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습니다.
또한 공무원은 취임 시 공산주의를 거부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경제 정책
살라자르는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를 옹호하되, 여러 자치 단체(노조, 근로자 법인 등)를 통해 통제되는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이 시기 눈에 띄게 성장한 분야는 관광업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해변과 기후는 유럽인들을 끌어모았고, 국내 관광객들 역시 국가 보조금 지원 휴가 제도를 통해 여행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농촌과 농업 생활을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는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특히 1960년대부터 속도가 붙었습니다. 1958년부터 1973년까지 포르투갈은 연평균 7%에 달하는 최고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살라자르의 후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Marcelo Caetano, 1906~1980)가 추진한 경제 정책의 전환점 덕분이었습니다.
외교 정책
살라자르의 외교는 매우 긴 기간에 걸쳐 전개되었지만, 그 기조는 언제나 포르투갈을 자유주의 사조와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중립 노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포르투갈군 파병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살라자르는 처음부터 중립을 선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과 영국이 사용할 수 있도록 아조레스 제도의 기지를 제공했습니다.
이 시기 리스본은 유럽 최대의 첩보 활동 중심지가 되었고, 비자를 구하려는 수천 명의 난민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주었습니다.
살라자르와 프랑코
포르투갈은 스페인 공화국을 위협으로 간주했고,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발발하자 살라자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장군의 정부를 승인했습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에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국경을 넘는 공화파 인사들을 송환하고, 미국과의 통신을 원활하게 해주었으며, 심지어 의용병 대대 창설까지 장려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이 자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스페인의 중립 확보에 힘썼습니다. 이를 위해 두 정상은 만나 1939년 이베리아 협약(Iberian Pact)을 체결하여 양국이 분쟁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가까웠지만, 개인적으로 두 독재자는 전혀 달랐습니다. 살라자르는 대학 교수 출신이었고 프랑코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중요한 현안에서는 서로 이해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코는 독일에서 군수 물자를 주문한 뒤 이를 살라자르에게 넘겨주는 등 물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UN)은 민족 자결권을 옹호하며 각국에 식민지 독립을 허용할 것을 압박했습니다.
살라자르는 이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 식민지의 지위를 '해외주(overseas provinces)'로 변경하고 모든 주민에게 포르투갈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영토에서 수많은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포르투갈인들의 아프리카 이주를 장려했습니다.
아울러 포르투갈 식민지배의 형제애와 인종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강도 높은 선전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브라질 사상가 질베르투 프레이레(Gilberto Freyre)의 사상을 활용해 영국식 식민주의와 달리 포르투갈인 정착민의 인종 혼합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반란 시도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
- 독신이며 금욕적인 이미지를 기워온 살라자르였지만, 실제로는 대중에게 철저히 숨겨진 몇몇 로맨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의 고향 비메이루에는 "여기에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박사가 태어났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으되 한 푼도 훔치지 않은 신사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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