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세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453년 도시가 함락되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던 무역과 문화의 연결고리가 끊어졌고, 이로 인해 여러 필수품의 공급 부족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새로운 무역로 개척을 위한 탐험을 촉진했고, 그 결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근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투르크(터키)인들의 등장
비잔틴 제국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무렵, 소아시아에서 새로운 강대국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투르크(터키) 제국입니다.
투르크인들은 몽골족과 혈연 관계가 있었으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에서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술탄'이라 불리는 군주의 통치를 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내모는 교육을 받은 잔혹한 병사들인 예니체리(janissaries)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휘두른 무기는 '시미터(scimitar)'라 불리는 곡도였습니다.
1296년, 투르크인들은 투르키스탄의 다른 부족들과 갈라져 지도자 오토만(오스만)의 지휘 아래 소아시아로 진격해 일부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오스만(Ottomans)이라 불리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에 상시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정복을 이룬 술탄 중 한 명은 무라트 1세(1360~1389)였습니다. 그는 발칸반도로 진격하여 비잔틴 도시 안드리노플(현 에디르네)을 점령하고 투르크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비잔티움과 유럽을 잇는 육상 교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무라트 1세는 세르비아군을 격파했지만,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밀로시(Milosh)라는 병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번개' 바예지드 1세
투르크인들의 정복은 이미 막을 수 없는 기세였습니다. 무라트의 후계자인 술탄 바예지드 1세, 별칭 '번개'는 기습 공격과 신속한 행군의 달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투르크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방면으로 진격했고, 문화와 종교가 위협받는다고 느낀 기독교 민족들 사이에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황제 마누일 2세는 정통 기독교(동방 정교회)의 이름으로 유럽의 기독교 민족들에게 투르크에 대항하는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습니다. 마누일 2세는 직접 파리, 런던, 밀라노, 제노아를 순방하며 신앙을 되살리고 열정을 일깨우려 했습니다. 이에 독일 황제 지기스문트가 나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장과 동맹을 맺었고, 8천 명의 병력이 발칸으로 진격해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바예지드는 이들을 기다렸다가 니코폴리스 전투(1396년)를 개시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고 주력부대를 언덕 뒤에 매복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열정에 사로잡혀 지휘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공격에 나섰고, 투르크군의 좌우익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매복해 있던 바예지드의 제3부대가 모습을 드러내 기독교 병사들에게 직진했고, 거의 모든 병력이 전장에 쓰러졌습니다.
승리한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지만, 배후 소아시아에서 다가오는 티무르의 군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타메를란(티무르)
그의 본명은 티무르(Timur)였으나 전투에서 다리를 저는 부상을 입어 '티무르 렝크', 즉 '절름발이 티무르'라 불렸고, 여기서 '타메를란(Tamerlane)'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그의 잔혹한 악명은 만방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몽골과 타타르 부족의 지배자였던 그는 기독교인들의 적으로 선언되었고 유럽 침공을 결심하기까지 했습니다. 페르시아 수도에 7만 개의 인간 머리로 피라미드를 세우고, 바그다드에는 9만 개의 머리로 또 다른 피라미드를 세운 그의 만행은 비극적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티무르는 8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반면, 바예지드가 보유한 병력은 1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양군 사이에서 앙카라 전투(1402년)가 벌어졌고, 투르크군은 완전히 궤멸당했습니다. 바예지드는 포로로 잡혔고, 몽골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철창에 유폐되었습니다.
티무르는 소아시아 전역을 휩쓸었으나 바다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비잔티움 정복에 착수하기 전, 먼저 동방의 중국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정 도중인 1405년 사망했고, 그의 거대한 제국은 빠르게 해체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콘스탄티노플의 최종 함락은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비잔티움 전역을 정복한 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습니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는 도시를 철저히 요새화했습니다. 공성전에 버틸 물자를 비축하고 5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무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주민 상당수는 이미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술탄의 계획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5월 29일 투르크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자 기독교 수비군은 대포로 맞섰습니다. 성찬식을 마친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직접 적진 속으로 돌진하다가 전사했습니다.
메흐메트 2세와 그의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고, 이틀 동안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대성당 돔 위에는 기독교 십자가 대신 투르크의 초승달 깃발이 게양되었습니다.